뇌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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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헌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김병욱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3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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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김병욱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3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907년 김병욱의 아들 성규(星圭)와 장손 호진(灝鎭) 등이 편집·필사하였다. 필사본의 경우 서문은 없고 권말에 김성규의 발문이 있다. 1923년 김우진(金祐鎭)이 연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서지적 사항

6권 2책. 필사본 및 연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등에 있다.

내용

권1·2에 시 434수, 권3에 서(書) 31편, 소 5편, 서(序) 3편, 기 3편, 발 2편, 권4에 제문 9편, 가장(家狀) 1편, 논설 18편, 전(傳) 1편, 표 3편, 권5에 잡저 8편, 권6에 잡저 5편, 공문(公文) 19편, 부록으로 가장 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이 책을 정초(正草)하기 전 주필(朱筆)의 흔적이 선연하게 남은 초록 시고(詩稿)가 권말에 함께 묶여 있다.

서(書)에는 당시 국권을 잡고 있던 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과 국정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와 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 및 흥선대원군에게 보낸 편지도 있어, 당시 그의 교유관계와 인맥, 정치상의 활약 등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내용들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시킬 삼정(三政)에 대한 고언(苦言)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삼정에 대한 견해는 「정축재소(丁丑再疏)」·「유곡역취모의(留穀亦取耗議)」·「논적정(論糴政)」·「논군정징색지폐(論軍丁徵索之弊)」·「사창절목(社倉節目)」 등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는 환자[還上]를 빌미로 국민을 수탈하는 갖가지 명목의 세금들을 열거하고, 환자를 정부에서 취급하지 말고 마을별로 관장하면서 모조(耗租: 환자를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둔 동안에 축이 날 것을 예측해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던 곡식)만을 정부가 거두어들일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군대의 위영제도(衛營制度)의 문란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여러 가지 혁신책들을 제시하면서, 정부의 집정자들에게 이러한 여러 역사적인 고찰과 그의 경략은 성인이 다시 난다고 하여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에는 그의 이런 견해를 집합한 『태평오책(太平五策)』이라는 역저가 있어 고종에게 많은 칭찬을 들었으나 불타고 없어졌다고 하였다.

「복사소견(鵩舍消遣)」은 그가 고향 문경에서 폐단을 일소하려다 토호(土豪)로 몰려 문화(文化)에 귀양가서 당시 삼정의 문란, 관리들의 수탈, 토호의 폐단, 당시 정객들의 인물평을 80여 조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자료이다. 「문경현구폐전말(聞慶縣捄弊顚末)」은 그가 문경의 유지들과 폐정을 척결한 전말을 적은 것이고, 임오군란의 시발을 분석한 「국변기략(國變紀略)」,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에서 일본의 침략을 예시한 「인항설(仁港說)」, 압록강 연안의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군(郡)으로 승격해 변방의 경계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한 「복사군의(復四郡議)」가 있다. 「수불론(讎佛論)」도 그의 역저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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