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자는 김택영(金澤榮)인데 교과서라고 해도 전문서의 수준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간행본의 경우 국내에는 다수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외에는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 도서관,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 일본 동양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은 한국국학진흥원,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남아 있다.
조선정부에서는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발표된 1895년의 교육조서에 따라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고 교과서를 편찬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사 교재로는 1895년에 『조선역사(朝鮮歷史)』 · 『조선역대사략(朝鮮歷代史略)』 · 『조선약사(朝鮮略史)』를, 1899년에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 · 『대한역대사략(大韓歷代史略)』 · 『동국역사(東國歷史)』를 관찬으로 간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내용이 조잡하고 틀린 곳도 적지 않아 새로운 편찬이 요구되고 있었는데, 그 요구에 응해 1902년에 『동사집략』을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편년체로 고려시대까지의 통사를 한문으로 저술한 책이다. 처음 한지 양장본 3책으로 출판했다가 곧 이어 양지 양장본 상 · 하 2책으로 간행하였다. 책의 크기는 국판이다.
상권은 삼국시대까지 233면인데 별도로 신기선(申箕善)과 김가진(金嘉鎭)의 서문이 있다. 하권은 고려시대의 서술로서 301면인데 별도로 이재곤(李載崐) · 이중하(李重夏) · 김교헌(金敎獻)의 발문이 있다.
한지 양장본과 거의 동시에 양지 양장본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수요가 폭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전의 관찬 교과서는 실학사서의 내용을 전재 초록한 것이어서 독창적인 서술이 적었다. 그러나 『동사집략』은 많은 사서를 재검하면서 독창적으로 저술함으로써 역사 저술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종전의 교과서에는 저자를 밝히지 않았는데 이 책부터 저자를 밝혀 사찬 사서의 길을 열었다. 그리하여 1905년부터 사찬 사서가 대량으로 출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종전 교과서의 역사 저술에 비해 한결 정돈되었다.
그리고 비록 편년으로 서술했지만, 고증에 힘쓰고, 간혹 사실과 사건을 원인과 결과에 따라 규명한 것이 발견될 정도로 방법론상으로도 발전된 서술이었다.
그런데 내용에서 종전에 없던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단군조선에 대해서 황원(荒遠)하다는 것이다.
단군기사가 불가를 대표한 『삼국유사』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유가를 대표한 『삼국사기』에는 소개되지 않아 믿기 어렵다는 것 같다. 그리고 일본 역사에서 단군을 부정하거나 일본 시조의 분가로 설명한 하야시(林泰輔)의 『조선사 朝鮮史』의 영향도 받아 황원해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하나 새로운 것은 고대사에서 『일본서기 日本書紀』와 위의 하야시의 『조선사』에서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재를 서술하는 등, 일본의 식민사학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책에는 없는 내용을 일본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고 크게 반기면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저술한 김택영은 당시 학부에서 현채(玄采)와 함께 역사 편찬을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당대 역사학자로 제일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러한 위치에 있으면서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조선부터가 실제 역사라고 주장한 것은 고조선을 중국의 분국으로 시작한 것으로 본 셈이다. 이어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임나(지금의 경상북도 고령)에 삼국을 통할하는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니, 이는 중국의 분국으로 시작한 조선이 삼국시대에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책이 나오던 당시의 일본의 침략은 고대사의 회복이어서 당연하다는 변론 방식의 역사 서술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사 인식을 오도했을 것은 물론, 역사교육을 통해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을 고양한다는 개화 계몽주의가 오히려 일제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당연시하는 역효과를 초래케 했다.
더구나 이 책 이후 많은 계몽운동의 책이 김택영의 주장에 따라 서술했으므로 그의 폐해가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말 계몽주의의 허실과 한계를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