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1층은 정면 3칸, 측면 4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창건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객관(客館) 옆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관아에 딸린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599년(선조 32) 임란공신(壬亂功臣)인 임권(林權)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중건하기 시작하였으나 끝을 보지 못하고, 다음 현감 남복시(南復始)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또한, 1783년(정조 7) 부사 임중원(林重遠)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때에는 불교포교당(佛敎布敎堂)으로 쓰여왔고, 그 뒤 안국사(安國寺) 승려 이철허(李澈虛)가 불하받았으나 저당채무조(抵當債務條)로 일본인에게 넘겼으며, 일본인은 다시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에 살던 이명주(李命周)에게 팔아넘겼다.
이명주는 1936년 이 건물을 양강(陽江)가로 옮겨 지어 금호루(錦湖樓)라 불렀으나 1971년 2월 현위치로 다시 이건되었다. 원래 관아가 자리하였던 남대천(南大川)가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무주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더불어 호남의 삼한(三寒)으로 꼽히는 명승이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문장가 성임(成任)의 〈한풍루시 寒風樓詩〉가 전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