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좌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판전민도감사 · 찬성사 ·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화(子華)
치암(恥菴)
시호
문제(文齊)
봉호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87년(충렬왕 13)
사망 연도
1349년(충정왕 1)
본관
함양(咸陽)
주요 작품
천수절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입조(入朝)하는 의헌(義軒) 홍탁(洪濯)을 보내며[送洪義軒濯賀天壽節朝元]
주요 관직
판전민도감사, 찬성사, 판삼사사, 함양부원군
관련 사건
강윤충 탄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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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박충좌는 고려 후기에 판전민도감사, 찬성사,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백이정 아래에서 주자학을 배웠으며, 충선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다. 이후 충숙왕 아래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원칙적으로 행정을 처리하였다. 충목왕 즉위 이후 서연관이 되었으며 정방을 맡았다. 이곡, 이제현, 민사평 등의 당대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판전민도감사 · 찬성사 ·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함양(咸陽). 자(字)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할아버지는 박지빈(朴之彬)이며, 아버지는 군부총랑(軍薄摠郎)을 지낸 박장(朴莊)이다. 어머니는 이존비(李尊庇)의 딸이다. 부인은 한안지(韓安之)의 딸이다. 자녀는 7명으로 장남 박소(朴玿), 둘째 아들 박정(朴珽), 셋째 아들 박경(朴瓊), 넷째 아들 박번(朴璠), 다섯째 아들 박여(朴璵)이고, 첫째 사위는 최자경(崔自敬), 둘째 사위는 홍유룡(洪有龍)이다.

주요 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에서 주자학(朱子學)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혜민국판관(惠民局判官)이 되어 1313년(충선왕 5)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 수도에 머물 당시 모시면서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국왕의 측근 신하인 박련(朴連)은 국왕의 뜻이라면서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였다. 박충좌는 이를 막다가 박련에게 참소를 당하여 섬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病)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고, 또 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가 되어 경상도(慶尙道)에서 염세(鹽稅) 걷는 일을 겸하였는데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內書舍人) · 밀직제학(密直提學) · 개성부윤(開城府尹)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하여 상을 받았다. 그해 11월 과거 시험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천(李蒨)과 함께 하을지(河乙沚) · 안길상(安吉常, 安吉祥) 등을 선발하였다.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8년(충목왕 4) 충혜왕(忠惠王) 시호를 요청하는 일로 인하여, 김륜(金倫)이 원나라에 강윤충(康允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할 때 이제현 등과 같이 참여하였다. 이곡(李穀), 민사평(閔思平), 이제현 등과 교류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화려한 집을 짓지 않았으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상훈과 추모

예안(禮安)의 역동서원(易東書院), 난곡사(蘭谷祠에 주1.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익재집(益齋集)』
『가정집(稼亭集)』
『급암시집(及菴詩集)』

단행본

김용선 편,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주석
주1

공신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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