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에서 주자학(朱子學)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혜민국판관(惠民局判官)이 되어 1313년(충선왕 5)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 수도에 머물 당시 모시면서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국왕의 측근 신하인 박련(朴連)은 국왕의 뜻이라면서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였다. 박충좌는 이를 막다가 박련에게 참소를 당하여 섬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病)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고, 또 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가 되어 경상도(慶尙道)에서 염세(鹽稅) 걷는 일을 겸하였는데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內書舍人) · 밀직제학(密直提學) · 개성부윤(開城府尹)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하여 상을 받았다. 그해 11월 과거 시험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천(李蒨)과 함께 하을지(河乙沚) · 안길상(安吉常, 安吉祥) 등을 선발하였다.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8년(충목왕 4) 충혜왕(忠惠王) 시호를 요청하는 일로 인하여, 김륜(金倫)이 원나라에 강윤충(康允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할 때 이제현 등과 같이 참여하였다. 이곡(李穀), 민사평(閔思平), 이제현 등과 교류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화려한 집을 짓지 않았으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안(禮安)의 역동서원(易東書院), 난곡사(蘭谷祠에 주1. 시호는 문제(文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