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96년(고종 33)에 둘째 아들인 안종화(安鍾和)가 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저자의 시문을 수습하여 시의 체제에 따라 편집하고 부친과 교유하였던 지인들의 서문을 받아 간행하였다. 김기수(金綺秀, 1832~?)의 서문에 의하면 처음에는 한시만을 모아 『방산시초(方山詩鈔)』라 하였는데, 후에 저자의 산문 두 편과 누락된 한시를 함께 엮어 『방산집』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권 1책. 목활자본.
권두에 김기수· 김윤식(金允植, 1835~1922)·조병항(曺秉恒)의 서문과 본문의 작품 목록이 수록되어 있고, 권말에 동생인 안정원(安鼎遠)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오언절구 36수와 칠언절구 63수, 권2에는 오언율시 39수, 권3에는 칠언율시 176수와 아들 종화에게 보낸 서신 1편, 스승인 홍직필의 제문 1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보유(補遺)라는 제목하에 목록과 오언율시 25수와 칠언율시 77수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여러 차례의 과장(科場)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과업(科業)을 포기하고 명승고적을 탐방하며 경물(景物)·감상(感想)·술회(述懷) 등 많은 시를 남겼다. 「배육신묘(拜六臣墓)」·「과사충사(過四忠祠)」 등은 노량진(露梁津)의 사육신묘와 과천의 사충사를 참배하고 그들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강촌즉사(江村卽事)」·「강사만음(江舍漫吟)」은 그가 살던 강촌의 자연 풍경을 유유자적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외에 시국을 근심하고 날로 변해가는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상이 간간이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평생 관직을 역임하지 않았기에 19세기 위항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김윤식은 서문에서 저자의 한시를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칭송하였다. 먼저 평생 자연에 묻혀 살았기에 전반적인 작품이 담백하고 맑으면서도 메마르지도 않다고 하였다. 반면에 당시 혼란한 시국을 개탄하며 쓴 시에서는 비장함과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서 한평생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던 두보(杜甫)에 견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