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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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보문산성 성벽위
대전 보문산성 성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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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중구 보문산(寶文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 테뫼식으로 축조된 석축 성곽. 산성. 시도기념물.
내용 요약

보문산성은 대전광역시 보문산에 있는 백제 시기에 테뫼식으로 축조된 석축 성곽이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평면은 남동∼북서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긴 타원형이다. 산성 동북벽은 급경사인 자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석축하지 않았다.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서남벽으로, 16단에 3.42m의 높이다. 서문 터와 남문 터가 남아 있는데 서문이 주된 출입문이다. 북단의 장대지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 성안에서 특별한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고 백제·고려 시대 와편이 나왔다. 이 산성은 1991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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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전광역시 중구 보문산(寶文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 테뫼식으로 축조된 석축 성곽. 산성. 시도기념물.
내용

1989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산성은 대전광역시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보문산에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표고 457.3m인 정상부보다 동쪽으로 돌출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시계가 양호하다. 이 산성의 평면은 남동∼북서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긴 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둘레는 수평 길이도 280m이다.

성체(城體)는 대부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적심방법(積心方法)으로 축조하였으나 동북벽의 급경사면은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석축하지 않았다. 동쪽 성벽의 잘 남아 있는 부분은 13단(段) 250㎝의 높이를 나타내며, 기초석으로부터 4단은 외면을 수직으로 축조하였으나 5단부터는 조금씩 물려 쌓아 규형(圭形)을 이루고 있다.

또한 적심에서 성벽까지의 최장 수평거리는 5.4m이며, 성밖의 기저(基底)에는 성벽에 붙여 너비 30∼80㎝ 정도의 구획에 납작한 돌을 깔았는데, 이것은 성벽 위로 넘쳐 흐르는 수량으로 인하여 기초부분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남동벽은 산능선의 연결선상에 있는 관계로 총길이 45m를 협축(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는 것)하였는데, 그 너비는 5.7m이다. 성 내외벽의 지반 차이는 1.3m에 이르며, 내벽은 현재 5단의 층교(層敎)에 높이 93m이다. 또한 이 동남벽 밖에는 외황(外隍 : 성 밖에 둘러 판 물 없는 못)을 설치하여 방어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 산성에서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서남벽으로 16단의 층수에 3.42m의 높이를 나타내고 있다. 문지(門址)는 서문지(西門址)와 남문지(南門址)가 남아있다. 서문지는 이 산성의 주된 출입문으로 북벽에 붙여서 설치하였다.

서문지를 이루는 남벽과 북벽은 암반 위에 내외협축으로 축조하였는데, 북쪽 성벽의 상부 너비는 7.5m이며, 남쪽 성벽의 기저부 너비는 6.9m이고, 상부 너비는 6.2m이다. 이 서문지 남쪽 성벽의 현존 높이는 8단 1.8m를 나타내고 있다. 이 남벽과 북벽 사이의 문너비는 넓은 곳이 5.5m, 좁은 곳이 4.5m인데, 후대에 1.4m로 줄여서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서문지의 특징은 고대의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 형태로 문을 들어서면 높이 1.1m의 암벽이 진로를 차단하며, 북쪽 성벽의 내벽이 이 암벽과 연결되어 있어, 문지의 우측인 남쪽 통로로 진입하도록 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지의 외벽에서 암벽까지의 거리는 8.6m이며, 그 고저차(高低差)는 2.27m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남문지는 너비 5.8m로 남동성벽(南東城壁)의 협축성벽이 끝나는 지점에 시설되어 있다. 협축 부분의 끝인 문지의 동벽은 암반을 50㎝ 정도 파내고 기초석을 놓았으며, 3단까지는 수직으로 석축을 하고, 4단부터는 물려 쌓았는데, 현재는 6단 1.3m의 높이를 나타내고 있다.

남문지 동쪽 성벽의 상부 너비는 6.6m로 남동쪽 성벽의 다른 협축부위보다 1m 이상 두껍게 축조하였다. 남문은 개거식(開渠式) 평문(平門)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지를 자연석과 산토(山土)로 폐쇄하여 놓았다.

동벽 내벽 석축구조 아래로 기둥구명 2열이 확인되었는데 성벽과 같은 방향을 이루고 있다. 이 기둥구명은 암반층을 깍아낸 것인데 바깥열 간격이 90cm로 3개 기둥구멍이 확인되었으며, 직경 25-30cm, 깊이 27-32cm이다. 여기에서 100cm 안쪽에 180cm 간격의 기둥구명이 4개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둥구멍은 서울 몽촌토성 발굴조사시 확인된 기둥구멍 간격과 같은 1.8m인 점과 기둥구멍 위에 석축구조가 있는 것을 보아 성벽 축조 이전에 목책시설의 일부로 파악된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기와류 중 간략한 인물선각화가 새겨진 파편이 발견되었다. 화면 크기는 4.1cm에 불과하며 아무런 뜻도 없이 새견진 낙서 종류의 그림이지만 구김살 없는 솜씨로 남자인물상 특징을 잘표현하고 있어 백제회화의 회소한 자료 중 하나이다.

성안에서는 특별한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선조문(線條文)의 백제시대 와편(瓦片)과 어골문(魚骨文)의 고려시대 와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산성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장대지(將臺址)는 계족산(鷄足山)∼식장산(食藏山)을 연결하는 능선 위에 위치하여 다른 산정들과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시의 복원·정비사업에 따라 1990년 3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이를 토대로 1991년 12월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보문산성발굴조사보고서』(대전직할시, 1994)
집필자
성주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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