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성(沙井城)은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에 있는 석성이다. 사정성은 백제 동성왕 20년(498)에 축조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아울러 백제 성왕 4년(526)에는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동성왕 때 축성했다는 사정성이 현재 대전에 있는 사정성인지, 동성왕 때 축조한 사정성과 성왕 때의 사정책이 동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백제 부흥운동기 때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군과 대전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사정책을 함락시킨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정성과 사정책은 다른 유적이라 볼 수 있다.
사정성(沙井城)이 자리하고 있는 대전 지역은 웅진과 사비의 동쪽 외곽에 해당되고, 신라와 국경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에 관내에 많은 산성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 산성들에 대한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하게 언제 축조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사정성(沙井城)은 대전시 관내에 분포하는 산성을 대상으로 정밀 지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함께 조사되었다.
사정성은 동성왕 때 만들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이상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성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기 어렵다. 더구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언제 축조되고, 언제 폐성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성왕 4년(526)에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동성왕 때 세운 사정성의 바깥쪽으로 사정책이 추가로 축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기 때 나당연합군이 지라성(支羅城), 급윤성(及尹城)과 대산책(大山柵), 사정책 등을 함락시킨 것으로 보아 사정성과 사정책은 다른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사정성은 해발 179m의 성재산 정상부에서 중복(中腹)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남쪽 성벽은 성재산의 정상부를 지나고 있는데 비해, 서북쪽 성벽은 성재산의 7부 능선까지 내려와 있어 삼태기식으로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성벽은 이미 완전히 붕괴되어 정확한 축성법을 살펴볼 수 있는 구간은 한 군데도 없다. 다만 성벽이 통과하는 지점에 붕괴된 성돌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석성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성벽의 높이는 3~4m 정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성재산의 정상부와 서벽 안쪽에는 평탄면이 있는데 이곳은 건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서는 기와편과 토기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습된 기와 중 안쪽 면에 포목흔이 아닌 갈대 같은 것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성왕 때 축조한 사정성이 현재 대전시에 있는 사정성이 맞다면 사정성은 축조 시기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성이 된다. 백제 웅진기의 축성법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