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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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곡임하(山谷林下)에 은거해 있으면서 학덕을 겸비해 국가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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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산림(山林)은 조선시대 산곡임하(山谷林下)에 은거해 있으면서 학덕을 겸비해 국가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은 인물이다. 산림지사(山林之士)·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산림독서지사(山林讀書之士)의 약칭이다.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는 학자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16세기말 성혼과 정인홍 등이 정치에 긴밀히 관여하면서 역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인조대에 산림의 정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산림직을 신설해 우대하였다. 조선후기 유교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유림을 대표하면서 정국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명분을 제공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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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산곡임하(山谷林下)에 은거해 있으면서 학덕을 겸비해 국가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은 인물.
내용

산림지사(山林之士) · 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 · 산림독서지사(山林讀書之士)의 약칭으로, 임하지인(林下之人) · 임하독서지인(林下讀書之人) 등으로도 불려졌다.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향촌에 은거해 있으면서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다. 정계를 떠나 있어도 정치에 무관심하였던 것은 아니며, 정계에 진출해 있으면서도 항상 산림에 본거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 후기 특유의 존재였다.

또한, 국가로부터 징소를 받아 관직의 제수를 비롯해 온갖 특별한 대우를 향유했던 부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하였던 단순한 일민(逸民)이나 국가의 징소를 받지 못한 여타의 재야학자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산림이라는 용어는 16세기말 성혼(成渾) · 정인홍(鄭仁弘) 등이 정치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면서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조선 후기에 과거를 거친 관료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향촌에 은둔해 있던 학자가 더 존중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데는,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사환(仕宦)에 매력을 잃고 향촌에서 침잠성리(沈潛性理)한 일부 사림(士林)들의 성향 변화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직접적인 은둔의 계기로 작용한 것은 당시 과거 제도의 말폐, 정치적 질서의 문란, 청나라에 대한 굴욕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산림의 정계 진출이 인조대부터 본격화되면서, 정부에서는 특별히 산림직을 신설해 우대하였다. 산림직은 마땅한 인물이 없으면, 자리를 비워둘망정 산림이 아닌 인물은 임명될 수 없는 관직으로, 산림의 특이성을 잘 대변해준다.

1623년(인조 1)에 설치된 성균관사업(司業, 종4품), 1646년(인조 24)에 설치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찬선(贊善, 정3품 당상관) · 익선(翊善, 종4품) · 자의(諮議, 종7품), 그리고 1658년(효종 9)에 설치된 성균관의 좨주(祭酒, 정3품 당상관)가 그것이다.

이 산림직은 실직을 가진 자가 임명될 때는 겸직이 되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임명될 때는 실직으로 되었다. 관계의 승전(昇轉)에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징소 과정에서도 식물(食物)이나 가교(駕轎) · 말[馬]이 지급되는 등 상규를 벗어난 예우를 받았다.

유교 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산림은 특히 17세기에 큰 기능을 행사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산림으로는 김장생(金長生) · 장현광(張顯光)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윤선거(尹宣擧) · 권시(權諰) · 허목(許穆) · 윤휴(尹鑴) · 박세채(朴世采) · 윤증(尹拯) · 이현일(李玄逸) · 권상하(權尙夏)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유림을 대표하면서 국왕에게는 정국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명분과 실리를 제공하였다. 즉, 인조 · 효종연간에는 숭명사상(崇明思想)과 북벌론(北伐論)을 적극 지지하면서 정권의 당위성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당의 영수(領袖)로 활약하면서 강한 학연(學緣)을 바탕으로 당의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그 당이 집권하였을 때는 그 집권의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산림의 구실이 가장 두드러지게 정치적 표면에 나타난 것이 예송(禮訟)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 예학(禮學)의 거두로서 예론을 하나의 당론으로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당을 대표해서 직접 선두에서 싸웠던 것이다. 수적으로 보면 집권 기간이 가장 길었던 서인 노론계의 김장생 · 송시열의 학통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산림은 또한 학덕을 겸비하였기에 교육적인 측면에서의 구실도 컸다. 경연(經筵) · 서연(書筵)에서의 강의를 비롯해 성균관 유생의 훈도 및 향촌에서의 문도 배양에 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의례적(儀禮的)인 측면이나 유교적 정치 요강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영조대 이후 실질적인 기능은 쇠퇴하고 오로지 유교사회의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의례적인 대우를 극진히 하여 국가가 유자(儒者)를 존중해준다는 명분을 세웠다.

세도정치하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악화되어 산림은 많이 등용되지도 않았고, 불과 몇 사람만이 산림으로 지목되어 외척(外戚)의 사인(私人)으로 전락해갔다.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깊은 연결을 가졌던 홍직필(洪直弼)이나 여흥민씨(驪興閔氏)와 연결을 가졌던 임헌회(任憲晦) 등이 그 예이다.

참고문헌

『당의통략(黨議通略)』
『증보여유당전서(增補與猶堂全書)』
『양전편고(兩銓便攷)』
『매천야록(梅泉野錄)』
『대동야승(大東野乘)』
『패림(稗林)』
『한사계(韓史綮)』
「한국유교의 명분주의(名分主義) 및 그 정치적기능에 관한 일고찰(一考察)-이조후기(李朝後期)의 산림(山林)에 대하여-」(이우성, 『동양학학술회의논문집』, 1975)
「17세기 산림(山林)의 진출과 기능」(우인수, 『역사교육논집』5, 1983)
「18·19세기 노론학계(老論學界)와 산림(山林)」(유봉학, 『한신대학논문집』3, 1986)
「17세기 중엽 산림세력(山林勢力)의 국정운영론」(정만조,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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