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의 정4품 관직으로, 유현(儒賢)을 임명하였다. 사업이 설치된 것은 1623년(인조 1) 5월이었다. 반정으로 정권을 교체한 인조와 반정세력들은 그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산림(山林)을 적극적으로 징소하였다. 산림들은 학덕이 높아 군주와 세자의 학문에 도움이 되며, 사림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 산림을 징소한 중요한 이유였다.
산림은 최고의 관학이자 예비 관료를 양성하는 성균관에 배치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여겼지만, 성균관 관원은 모두 문관을 임용하였기 때문에 산림을 위한 관직을 설치한 후 제수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사업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산림을 초빙하여 이들이 재임할 수 있도록 만든 관직을 산림직이라고 한다.
사업은 산림직 가운데 가장 먼서 설치되었다. 이후 성균관에는 1658년(효종 9)에 좨주(祭酒)가 정3품 당상관으로 설치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찬선(贊善) · 진선(進善) · 자의(諮議)가 산림직으로 설치된 관직이었다.
1623년(인조 1)에 처음으로 사업을 설치하였을 때 김장생(金長生) · 장현광(張顯光) · 박지계(朴知誡)를 사업으로 임명하였고, 3명의 사업을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 3명의 산림은 모두 사직을 청하였고, 국왕과 신료들의 만류에도 장현광은 끝내 사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도 관직에 지속적으로 출사한 것은 아니었기에 1632년(인조 10)에는 예조에서 사업으로 2인을 선임하자고 다시 청하였다. 이렇게 초기 3인으로 설치하였던 사업의 정원은 2인으로 조정되었으며, 이후 1명으로 정원이 확정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사업 1인이 증치되었고, 대신 사성 1명이 감원되었다. 사업은 유현을 추천받아 단부(單付)의 형식으로 임명하였는데, 1648년(인조 26)에 선우협(鮮于浹)을 임명할 때 처음으로 단망을 통한 인사가 이루어졌다. 사업은 본직을 가지고 임명되면 겸직이 되고, 본직이 없으면 본직이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업 뿐만 아니라 산림직의 공통점이기도 하였다.
인조 대에 사업이 설치된 이래 사업에는 조선 후기 사상 · 정치계를 주도하던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김장생 · 박지계 · 장현광뿐만 아니라 윤선거(尹宣擧) · 윤휴(尹鑴) · 박세채(朴世采) · 윤증(尹拯) · 이현일(李玄逸) · 권상하(權尙夏) 등 당대 최고의 산림들이 사업에 임명되었다. 사업의 역할은 대사성과 협력하여 유생들을 훈도하고 도학(道學)을 강의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업은 경연에 입시하여 국왕에게 진강을 하기도 하였고, 의례 문제를 논의하는 데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1685년(숙종 11), 사업인 박세채는 문묘 제례 개정 논의에 참여하였는데, 성균관 사업으로서 문묘의 문제에 의견을 내고 조언하는 것은 직임에 맞으면서도 산림이 할 수 있는 적절한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후 성균관에는 정3품 당상관 좨주가 설치되었고, 양송(兩宋)이라 불리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임용되었다. 사업의 상위직이 새로 설치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