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聖住寺)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무염이 창건한 사찰이다. 본래 백제 오합사였으며, 김인문이 웅천주 일대를 봉지로 받으며 사찰을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헌창의 난으로 폐허화가 된 것을 847년 무염이 주석하면서 크게 확장하자 왕이 ‘성주’라는 이름을 내렸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가 13세기 후반에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쇠퇴하다가 17세기 완전히 폐사되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와 보물로 지정된 4기의 석탑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의하면 845년(문성왕 7)에 중국에서 돌아온 무염(無染)에게 김흔(金昕)이 반쯤 재로 변해버린 웅천주의 한 사찰에 머물러 줄 것을 청하였고, 847년 무염이 그곳에 머물며 절을 크게 확장하자, 문성왕(839~859)이 ‘성주(聖住)’라는 사찰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성주사 이전에도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숭엄산성주사사적기(崇嚴山聖住寺事績記)」에서는 “본래 수 양제 대업 12년(616) 기해에 백제국 28대 혜왕의 아들 법왕이 건립한 오합사(烏合寺)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다수가 백제 오합사를 성주사의 전신(前身)으로 보고 있다. 오합사는 오함사, 오회사 등으로도 불렸다.
성주사는 1968, 1974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 · 조사를 시작으로 1991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2009년 이후 주3 중심부 및 주변부까지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굴 조사를 통해 성주사 창건 이전에 사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성주사에서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경에 제작된 백제 기와들이 소량 출토되어 성주사 이전 백제시대 사찰이 존재했다고 추정한다. 다만 김흔이 무염에게 주석을 청한 사찰은 김인문이 웅천주 일대를 주2로 하사받은 7세기 후반경에 창건한 사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성주사 이전 가람은 무염이 주석할 때 이미 재로 변해버렸다고 하는데, 이는 822년(헌덕왕 14)에 웅천주를 거점으로 일어난 ‘ 김헌창의 난’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847년 무염은 성주사를 창건하였는데, 김흔, 김양 등의 중앙귀족과 왕족들의 후원을 받았다. 주4 중 하나인 주5의 본사로서 사세를 떨쳐 전성기에는 최대 약 1,000여 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존재했고, 2,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며 수도했다고 한다.
성주사는 13세기 중엽 상당수의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원인으로 몽골의 침입을 꼽고 있다. 한편 ‘大德五年(1301)’이 새겨진 청동 광명대나 청자 편 등의 유물을 볼 때 소실된 성주사는 곧바로 13세기 후반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중건된 성주사에는 사찰 중심부에 삼천불전 등 대형 건물이 조성된 것이 특징인데, 보령 지역 일대 재지 세력들의 경제적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성주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초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중문터, 석등, 오층석탑, 금당터,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동 삼층석탑, 중앙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고, 맨 뒤에 강당터가 위치하고 있다. 금당 뒤쪽에 석탑 3기가 나란히 배치되는 가람은 성주사가 유일하다. 오층석탑과 금당, 강당을 중심으로 하는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를 조성한 후 석탑 3기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추가로 배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4기의 석탑은 모두 통일신라 후기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탑비는 국보로 지정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후 성주사지의 역사와 인물, 문화재를 설명하는 '성주사지 천년역사관'이 2022년 개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