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중심사찰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이 사찰이라는 사실이 1960년부터 수합된 기와 조각에서 확인되었다.
백제의 멸망 직전에 이 절에 큰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주었다고 한다. 599년(법왕 1) 헌왕태자, 곧 법왕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국사 무염(無染)이 김양(金陽)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고 주지가 되어 선도(禪道)를 선양하게 되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리게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성주산파의 총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건되지 못하여 현재 폐사 터만이 198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번창하였을 때에는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성수천을 따라 10리나 흘러내렸다고 한다.
문화유산으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4기의 석탑과 석등 · 석불입상 · 당간지주 · 석계단 등이 있어서 옛날의 규모를 말해준다. 이 가운데 백월화상 탑비는 890년(진성여왕 4)에 세워진 신라 최대의 것으로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썼는데 고어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기의 석탑은 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조각수법이 우수한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197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등이다.
또한 높이 1.85m의 석등이 있으며, 현재 2단이 남아 있는 석계단은 목에 방울이 달린 석수가 앉아 있으며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97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삼천불지(三千佛址)를 발굴하였고, 최근에는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여러 해에 걸쳐 전 사역을 발굴하여 사찰의 규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성주사지는 1984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정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