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오묘 ( )

고대사
제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시조 혁거세묘 ‧ 신궁과 함께 설행한 유교적 종묘제.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통일신라시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라오묘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시조 혁거세묘·신궁과 함께 설행한 유교적 종묘제이다.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시조 혁거세묘·신궁과 혜공왕 대에 처음 정한 5묘를 종묘로 규정하였다. 중대에 무열왕계가 새로이 5묘제를 수용한 것은, 그들의 왕통이 지증-법흥-진흥-진지-문흥을 잇는 대종(大宗)으로, 소종(小宗)인 ‘진평-선덕-진덕’의 중고기 왕실과 구분함으로써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공왕 대에는 5묘제에 기왕의 종법제 원리와 조공종덕의 원리를 더하였고, 애장왕 대에는 이를 지키면서 사실상 7묘제를 지향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시조 혁거세묘 ‧ 신궁과 함께 설행한 유교적 종묘제.
내용 및 변천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시조 혁거세묘 · 신궁과 함께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대에 처음으로 정한 5묘를 신라의 종묘로 규정하였다. 이는 『 예기』 왕제(王制)편에서 천자 7묘, 제후 5묘만을 종묘로 규정한 중국의 유교적인 예제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신라는 이를 변형시킨 독특한 5묘제를 운영하였다.

신라는 5묘제 수용 이전부터 나름대로의 종묘제를 시행하였다. 서기 6년(남해차차웅 3)에 시조 혁거세묘를 세워, 새로이 즉위한 왕은 시조묘에 제사를 드려 즉위 사실을 알렸다. 그후 김씨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487년(소지마립간 9)에 시조 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하였다.

신궁에 모신 신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소지마립간이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지인 나을에 신궁을 건립한 것은, 『예기』 대전(大傳)의 “임금된 자는 조상이 출현한 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조상을 배향한다”는 기사로부터 빌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대 왕실은 이러한 전통적인 종묘제와 함께 다시 종법제를 바탕으로 한 5묘제를 새로이 받아들였다.

신라에서 5묘제가 제도로서 처음 나타나는 것은 혜공왕 때이지만, 그에 앞서 선조묘, 조묘(祖廟) 등의 명칭이 나타난다. 특히 687년(신문왕 7) 4월에는 대신을 조묘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조묘에는 태조대왕을 묘주로 하여 신문왕의 고조 진지왕, 증조 문흥대왕(文興大王, 龍樹), 조(祖) 태종무열왕, 고(考) 문무왕을 모셨다.

신문왕이 제사를 지냈다는 조묘는 『예기』에 보이는 제후의 5묘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중대 왕실이 5묘제를 수용한 시기나 그 성격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어떠한 견해라고 하더라도 무열왕계에 의해 5묘제가 수용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중대 무열왕계의 왕실이 지증-법흥-진흥-진지-문흥을 잇는 김씨 왕실의 대종(大宗)으로서, 소종(小宗)인 ‘진평-선덕-진덕’의 중고기 왕실과 구분함으로써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혜공왕 때에 처음 제도화된 5묘제는 묘주를 태조대왕에서 시조대왕 미추왕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 또한 태종무열왕 ·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대공덕이 있으므로 묘주 시조대왕과 함께 대대로 옮기지 않는 신주로 삼고, 조 · 고인 성덕왕경덕왕을 부묘하여 5묘를 정하였다.

묘주의 변화는 무열왕계 김씨 왕실의 조상 제사를 국가 제사의 지위에 걸맞게 개혁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혜공왕 때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백제, 고구려를 평정한 공덕으로 대대로 옮기지 않는 종[세세불훼지종(世世不毀之宗)]으로 삼았다는 것은, 새로이 한 나라의 창업주나 그에 버금하는 군주에게는 조(祖)를, 덕이 있는 자에게는 종(宗)을 묘호로 삼는 조공(祖功) · 종덕(宗德)의 이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혜공왕 당시에 시조와 태종무열왕이 혜공왕의 5대조로서, 직계 4조의 소목에서 훼철해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혜공왕 대의 5묘 소목(昭穆)에 경덕왕에 앞서 재위하였던 효성왕의 신위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시 신라의 5묘제가 ‘형제는 서로 후계를 삼을 수 없다’는 것과 후사가 없는 국왕은 부묘하지 않는다는 중국 한대 이래의 세차론에 따른 것이었음을 반영한다.

선덕왕[김양상]은 내물왕의 10세손으로,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 효방을 개성대왕에 추봉하고, 경덕왕을 천사하고 성덕왕과 개성대왕을 부묘하였다. 이처럼 외조부와 고(考)라는 비혈연의 신주를 소목에 나란히 배열한 것은, 선덕왕이 성덕왕의 외손으로서 무열왕계 성덕왕의 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천명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직계 혈연만을 봉사하는 종묘 운영의 종법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즉위하자 직계 4조를 추봉하였으나, 5묘에는 조 · 고만을 부묘하였다. 이는 혜공왕 때의 조공 · 종덕의 원칙을 지키면서 5묘의 묘실수를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왕실의 가계가 바뀌고 조 · 고를 추봉함으로써 소 ‧ 목을 함께 천사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801년(애장왕 2)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별도로 세우고[별립(別立)]’, 직계 4조를 5묘에 봉사하였다. 이는 하대의 새로운 왕통의 종조(宗祖)인 원성왕의 신위를 훼철하지 않고 계속하여 제사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이로써 왕위 계승에서 직계 상속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의식되었고, 방계와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혈족집단 자체를 가족 단위의 적은 단위로 분지화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근래에는 애장왕 대의 종묘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옮기지 않는 신주로 두면서, 역사(逆祀) 내지 비혈족 부묘의 폐단을 없애고, 직계 4조로써 소목의 차서를 엄격히 한 사실상의 7묘제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황남동 123-2번지 대형 건물지가 북편 중앙의 중심 건물과 동서 양쪽의 각각 3동씩 배치된 것으로 미루어 7실로 구성된 종묘의 구성 양식으로 본다.

하대에 적통이 아닌 왕이 즉위하면 그의 직계 4조 가운데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추봉하고는 하였다. 이로써 동일한 고조와 증조의 자손인 이들 형제, 숙질, 사촌 간의 왕위 경쟁에서, 종묘에는 조(祖)와 고(考)의 소목만이 들고 나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는 원성왕의 손자인 인겸과 예영을 종(宗)으로 하는 별자(別子)들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때문이었다.

원성왕의 적통인 ‘ 인겸태자- 소성왕-애장왕’으로 이어지는 혈연이 대종이었다면, 인겸의 별자로서 헌덕왕, 흥덕왕, 충공, 그리고 예영의 별자로서 헌정균정이 각각 소종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하대의 왕위 계승은 적통자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적통자의 후계자가 없을 때에 대종에서 나뉜 차순위 별자가 우선하여 왕위를 이음으로써 동 별자의 장자가 이를 승계하였고, 그 후계자가 끊길 경우에는 무력 대결을 통해 다른 별자나 그 후손이 왕통을 이어나갔다.

의의 및 평가

신라가 혜공왕 대에 5묘제를 처음 정하면서 당시에 세운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대대로 옮기지 않는 종으로 하되, 소목의 구성은 신문왕 대 이래의 직계 4조를 모시는 것을 모범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형제는 부묘하지 않고, 형제가 왕위를 계승하면 선왕인 형왕(兄王)을 부묘하지 않았다.

애장왕 대에 정립한 종묘제 또한 그러한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직계 혈족을 중시하고 방계와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었다. 이는 5묘 또는 7묘를 세우는 종묘제가 종법제와 조공 · 종덕의 원리에 바탕한 때문이었다.

신라 하대에 벌어진 ‘왕위 계승전’은 대종의 후손이 끊긴 상황에서 별자의 자손들 간에 왕위 계승권을 두고 벌인 무력의 대결 과정이었고, 승리한 별자와 그 후손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획득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대 이후, 신라 5묘 내지 7묘제는 신라 김씨 왕실에 있어서 왕위 계승의 적통성을 밝히는 표지로서 작용하였던 바, 역대 국왕들이 즉위와 함께 자신들의 조고를 종묘에 부묘함으로써 왕위 승계의 정통성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구당서』
『삼국사기』
『예기』

단행본

채미하,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혜안, 2008)
나희라, 『신라의 국가제사』(지식산업사, 2003)
최광식,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한길사,1995)
최재석, 『한국고대사회사연구』(일지사, 1987)
濱田耕策, 『新羅國史の硏究』(吉川弘文館, 2002)

논문

강진원, 「신라 중대 종묘제 운영과 오묘 시정」(『역사학보』 245, 역사학회, 2020)
김나경, 「신라 오묘제 수용의 의미」(『한국고대사연구』 97, 한국고대사학회, 2020)
박남수, 「신라 종묘제의 정비와 운영: 중국 종묘제의 변천 및 운영 원리와 관련하여」(『신라사학보』 49, 신라사학회, 2020)
박남수, 「당의 사전 체계와 신라의 사전 정비」(『신라사학보』 45, 신라사학회, 2019)
박남수, 「신라 문무대왕의 삼국통일과 종묘제 정비」(『신라사학보』 38, 신라사학보, 2016)
이문기, 「신라 오묘제의 성립과 그 배경」(『한국고대사와 고고학』, 학연문화사, 2000)
이종태, 「신라의 시조와 태조」(『백산학보』 52, 백산학회, 1999)
박순교, 「신라 중대 시조 존숭관념의 형성」(『한국 고대의 고고와 역사』, 학연문화사, 1997)
황선영, 「신라의 묘제와 묘호」(『동의사학』 5, 동의대학교사학회, 1989)
정재교, 「신라의 국가적 성장과 신궁」(『역사와 세계』 11, 효원사학회, 1987)
신종원, 「삼국사기 제사지 연구: 신라 사전의 연혁·내용·의의를 중심으로」(『사학연구』 38, 한국사학회, 1984)
최광식, 「신라의 신궁 설치에 대한 신고찰」(『한국사연구』 43, 한국사연구회, 1983)
변태섭, 「묘제의 변천을 통하여 본 신라사회의 발전과정」(『역사교육』 8, 역사교육연구회, 1964)
米田雄介, 「三國史記に見える新羅の五廟制」(『日本書紀硏究』 15, 塙書房, 1987)
小田省吾, 「半島廟制槪要」(『朝鮮』 269, 1937)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