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문(景文), 호는 일환재(一丸齋) · 은파(恩坡). 영의정 심지원(沈之源)의 현손이며, 심사만(沈師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동진(沈東鎭)이고, 아버지는 심형운(沈亨雲)이다. 어머니는 승지 김고(金槹)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가정이 빈한했으나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775년(영조 51) 식년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정조 초년에는 주로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홍국영(洪國榮) · 김종수(金鍾秀) · 심환지(沈煥之)를 김구주(金龜柱)의 당여로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고부재자관(告訃齎咨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0년 이후에는 희천군수 · 제주목사 등 외직을 역임했다. 이는 심낙수의 언론이 과격하여 심낙수를 아끼는 친구 서유린(徐有隣)의 뜻이었다고 한다. 1795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파산(坡山)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홍양호(洪良浩) · 심이지(沈頤之) · 홍낙순(洪樂舜) · 이규경(李圭景)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심환지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김구주와 함께 홍봉한(洪鳳漢) 공격을 의리로 삼자 심환지와 결별하였다. 그 뒤 남 · 북당의 분열을 화의 근본이라 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심환지 · 김종수 · 유언호(兪彦鎬)를 맹렬히 공격함으로써 이른바 시파(時派) 언론의 선봉이 되었다.
이 때문에 신유사옥 때는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6년 후에 신원되기도 하였다. 이는 심낙수의 처가 홍봉한의 친우인 이사질(李思質)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심낙수의 할머니의 할아버지인 최규서(崔奎瑞) 집안의 영향을 받아 탕평책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집을 보고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며, 김양행(金亮行) · 김원행(金元行)의 정치적 입장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인 권진응(權震應)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해서 호락논쟁(湖洛論爭: 권상하의 문인들이 인간과 동물의 성품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해 벌인 논쟁)을 세도의 화근이라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은파산고』를 지었다. 시파의 입장에서 벽파(僻派)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전기를 남겼으며 그 본말의 기록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세하게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