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神宗, 11441204, 재위 11971204) 왕탁(王晫)은 인종(仁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명종(明宗)의 동생이다. 최충헌의 난으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7년째인 1204년(신종 7) 정월 정축일에 나이 61세로 덕양후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44일이 지난 2월 경신일에 개성 남쪽에 장사를 지냈고 능호를 양릉이라 하였다.
이후 25개월간 신종의 신주는 혼전에 모셔두었다가, 1206년(희종 2) 2월 기미일에 태묘에 부묘하였다. 같은 해 9월 갑오일에 희종이 양릉을 알현하고, 능 옆의 창신사(彰信寺)를 다시 지어 그 편액을 효신(孝信)으로 바꾸었다.
1204년(신종 7) 정월 정축일에 사망하여 그해 2월 경신에 개성 시내에서 남쪽으로 동서로 뻗은 룡수산 칠보봉(七寶峰)에 장례를 지냈다. 희종이 1206년 9월에 양릉 옆에 효신사를 세웠으나 현재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왕릉의 관리가 부실하였지만, 신종 양릉은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 현종 3년(1662) 『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의하면 양릉의 위치는 개성부 남쪽 용수산 무통현 서남쪽에 있다고 조사되었다. 당시 양릉은 능의 형태는 있으나 5〜6척에 불과하였고, 사면 석물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계체석은 다 파내어 능토가 훼손되었는데, 파괴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좌우의 장군석은 파내고 옮겨 세운 흔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도굴을 당하였다. 원래 능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였지만, 현재는 개성특별시 개풍군 고남리로 지명이 바뀌었다.
양릉의 능역은 약 1,000㎡ 정도이다. 산기슭 경사면을 이용하여 장방형의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몹시 퇴락되어 층단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봉분은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인데다가 1963년 조사 당시 봉토의 유실이 심하여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고, 봉토의 높이는 180㎝, 지름은 660㎝였다. 1995년 개성시 문화유적관리소에서 보수공사를 하면서 봉분에 흙을 보충하고 능역에 잔디를 입혔다.
1963년 당시에는 난간 석주들이 봉분 속에 군데군데 끼여 있었으나, 1995년 수리를 하면서 봉토 주위를 두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찾기 어렵다. 현재 도로 사이에는 깨진 난간 기둥석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고, 왕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다.
봉분의 북쪽 모퉁이에는 곡장을 쌓았던 돌무더기 흔적이 남아 있다. 1916년 조사 당시 직경 7.27m이었고, 1978년 북한에서 조사하였을 때는 높이 290㎝, 지름은 900㎝였고, 2008년 실측 봉분의 높이는 285㎝이며, 지름은 660㎝이다. 제1층단에는 동서 양쪽에 문석인 1쌍이 남아 있다.
두 문석인이 마주 선 거리는 930㎝이다. 문석인들은 한 돌을 깎아 만들었고, 둘 다 대석 위에 조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쥔 모습이며, 조각 솜씨는 거칠고 조잡하다. 서쪽 문석인은 높이 158㎝, 어깨 너비는 46㎝, 두께는 38.1㎝이다. 대석 부분은 땅에 거의 묻혀 있고, 땅에 묻힌 부분의 높이는 22㎝이다. 동쪽 문석인은 158.2㎝, 어깨 너비는 46.2㎝, 두께는 38㎝이다.
1963년에 조사할 당시 조선 고종 4년(1867)에 세운 표석이 앞으로 넘어져 있었고, 나머지 석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제3층단 앞에 있던 정자각 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78년 8월 6일부터 수일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양릉을 발굴 조사하였다. 무덤칸은 완전히 지하에 있는데 그 방위는 지상의 봉분과 거의 일직선상에 놓이는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67㎝, 동서 너비 295㎝, 높이 277㎝이다. 무덤칸은 두께 50㎝ 되는 돌을 6단으로 쌓아 올렸고 벽면에는 회를 발랐다. 그러나 회는 전부 떨어져 없으며 천장에도 회를 발랐다.
천장은 평천장으로 직경 약 123㎝의 천구원을 그리고, 원 안에 북극삼성과 북두칠성을 비롯한 성좌를 표시하였다. 원의 외곽으로는 28숙을 비롯한 별무리와 달을 그렸다. 천체도의 북쪽 부분이 떨어져 북방칠수는 마멸되었다. 남아 있는 별의 수는 158개이다. 별은 붉은 색으로 0.5~0.9㎝ 크기로 그렸고, 별과 별 사이에는 붉은 선으로 연결시켰다.
널방 남벽에는 두 개의 큰 판돌을 세워 문틀을 이루게 하였다. 이 두 개의 판돌 높이는 226㎝, 높이는 255㎝, 두께는 27㎝였다. 벽체는 석실에 바닥을 고르게 한 다음 그 위에 쌓았고, 남벽에는 큰 판돌을 세워 문틀을 이루고 있다. 문의 높이는 216㎝, 문에는 돌을 잘 다듬어 문턱을 만들어 놓았고, 동벽과 서벽의 남쪽 끝에는 아래 위에 가름대를 건너 대었던 구멍과 나무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무덤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관대는 바닥 중심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만들어 놓았다. 관대는 길이 267㎝, 너비 140㎝로 40 x 31㎝ 크기의 돌로 포장하듯 깔았다. 관대는 고임 없이 무덤칸 바닥에 깔았기 때문에 높지 않으며 바닥에 깐 전의 높이와 같다. 천장의 크기가 비슷한 3개의 널돌을 남쪽부터 가지런히 덮었다. 널방의 벽과 천장은 회죽으로 미장하고 여기에 벽화를 그렸다. 동벽과 남벽은 벽화 흔적이, 서벽과 북벽에는 사람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은 방전을 깔았으며, 관대는 바닥 위에 네모진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 놓았다. 관대의 크기는 2.72 x 1.5m이고 다양한 유물이 수습되었다. 고려자기를 비롯하여 길이 28㎝에 너비 22㎝의 도금한 청동제 자물쇠, 백동거울, 직경 약 2㎝ 정도 되는 금동방울 1개, 걸개못, 몇 종류의 쇠못과 돈이 나왔다.
그중 주목할 것은 능주를 알 수 있는 신종의 대리석 시책(諡冊)이 출토된 점이다. 그동안은 도굴되어 장물로 수습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시책과 비교된다. 다양한 고려자기가 수습되었는데, 지름 13.5㎝ 되는 상감청자국화문 분합뚜껑 1개, 모란문완, 화형접시, 백자접시 등 고려자기의 편년에 기준이 될 만한 유물들이 보고되었다.
신종의 양릉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로 능제와 내부 구조를 알 수 있고, 특히 널방에서 신종의 시책이 발견되어 능주가 확인된 왕릉으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봉분 내부 천장에서는 회를 바르고 별자리를 그린 벽화가 발견되었고, 편년 자료가 될 고려자기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