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한시를 지을 때 전고(典故)나 사실을 인용하는 시작법이다. 용사는 경서나 사서 또는 여러 사람의 시문에서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을 2, 3개의 어휘에 집약시켜 시의(詩意)를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송대(宋代)의 시풍이 기세를 중히 여기고 도(道)를 위주로 하게 되면서 용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 시학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나 조선에 있어서도 용사는 시작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천연스러운 전고의 인용은 오히려 시의 의취를 풍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문의 인용은 잘못하면 표절과 답습에 기울어지기 쉬웠다.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또는 여러 사람의 시문에서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2, 3개의 어휘에 집약시켜 시의(詩意)를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의 시풍이 산문의 흥기와 성리학의 발달로 인하여 시의 기세(氣勢)를 중히 여기고 도(道)를 위주로 하게 되면서, 원래 문장 수사법의 하나로 이용되었던 용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시학(宋代詩學)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고려나 조선에 있어서도 보편화되어 용사를 모르고서는 시를 지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시작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의 성률(聲律)이나 의취(意趣)에 있어 독창적인 경지를 구축하기가 중국인에 비하여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히 선대 시인들이 이룩한 유형의 모방과 습용(襲用)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시 특히 근체시의 오언 · 칠언의 엄격한 정형을 살리면서 의취를 압축 표현하고 강조할 때에 부분적 시구의 인용이나 전고의 원용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수사 방법이다.
그리하여 천연스러운 전고의 인용은 오히려 시의 의취를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전이나 사서의 인용과는 다르게, 시문의 인용은 잘못하면 표절과 답습에 기울기 쉬운 것이다.
고려의 최자(崔滋)는 “근세에 동파(東坡)를 숭상하는 사람은 대개 그 기운(氣韻)이 호매(豪邁)하고 뜻이 깊고 말이 풍부하며, 고사를 인용함이 두루하여 그 문체를 거의 본받을 수 있음을 사랑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후진들은 『동파집』을 읽으면서 본받아서 그의 풍격(風格)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증거하여 이것으로 고사를 인용하는 도구로 삼으려 한다.”( 『보한집(補閑集)』)라고 하였다. 용사에 치우친 나머지 답습 내지는 모방을 일삼는 풍조를 비난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고인의 이름을 많이 인용한 것을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라 하였고, 용사의 기교가 부족한 것을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라 하여 꺼렸다. 이인로(李仁老)는 용사를 많이 한 것을 ‘점귀부(點鬼簿)’라 하여 작시의 병폐로 보았다.
조선에 들어오면서 용사의 풍조는 크게 번창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은 용사가 정절(精切)한 시를 종종 선평하였다. 용사의 한 방법으로 번안법(翻案法)을 소개하고 용사 내지는 도습을 어느 정도 당연시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용사에 대한 옹호가 적극적이었다. “두보의 시가 전고(典事)를 쓰되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자작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출처가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시성(詩聖)이라는 칭호를 얻게 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또한, 시를 쓰면서 전혀 용사를 하지 않고 음풍영월 이나 하고 바둑이나 술을 노래하면서 겨우 운자나 다는 것은 시골의 고루한 훈장들이나 하는 것이라 하였다.
정약용은 “이로부터 시를 지을 때에는 반드시 용사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고사만을 사용한다. 이 또한 비루한 성품 때문이다. 마땅히 『삼국사기』 · 『고려사』 · 『국조보감』 · 『동국여지승람』 · 『징비록(懲毖錄)』 · 『연려실기술』 및 기타의 우리 나라 문헌들에서 그 사실을 취하고 그 지방을 고증하여 시에 쓰도록 하여야만 세상에 이름을 남기며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제21권 ‘기연아(寄淵兒)’라는 글에서 용사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용사의 대상을 중국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고전에서 찾아 써야 한다고 말하였다.
용사의 내용으로는 고인명(古人名) · 관명(官名) · 고인어(古人語) · 고인사(古人事) 등 다양하다. 특히 서거정은 용사를 직용(直用)과 반용(反用)으로 나누고, 직용은 쉽지만 뜻을 뒤집어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최자도 용사를 함에 재치가 있지 않으면 뜻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말이 생소해진다고 하였다. 마치 물에 소금이 녹아 있듯이 흔적이 없어야[無斧鑿之痕] 하며, 전고가 완전히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작품상에서 조화미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용사를 한 시보다는 용사를 하지 않은 시를 우위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용사를 작시법의 하나로 인정하였으나 이를 될 수 있는 한 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