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표는 신라·고려시대에 사령(寺領)을 표시하기 위해 사찰 주변에 세웠던 표지물이다. 장생표탑(長生標塔)·장생표주(長生標柱)라고도 한다. 사찰이 소유하였거나 수조권을 행사하던 토지를 구별하기 위해 그 경계 지역에 세웠던 경계 표지이다. 재질에 따라 목장생과 석장생으로 구분한다. 석장생은 형태에 따라 입석형·석비형·석적형으로 나누어진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장생표는 759년 장흥의 보림사에 세워졌던 석비형 장생이다. 통도사의 장생표는 국가 또는 왕의 명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서 특별히 국장생(國長生)이라 부른다.
일명 장생표탑(長生標塔) · 장생표주(長生標柱)라고도 하며, 장생(長生)으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사찰이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수조권(收租權)을 행사하던 토지와 여타의 토지를 구별하기 위해 그 경계지역에 세웠던 경계 표지이다.
장생표의 기원에 대해서는 남근숭배(男根崇拜)와 도교의 장생불사사상이 융합되어 발생했다는 견해와, 민속신앙이었던 소도(蘇塗) · 입석(立石) · 누석단(累石壇) 등에서 연원하여 사찰의 수호신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이설도 있다. 장생표는 그 재질에 따라 목장생(木長生, 木柱型)과 석장생으로 구분한다.
석장생은 형태에 따라 다시 입석형(立石型) · 석비형(石碑型) · 석적형(石積型 : 작은 돌을 여러 층으로 쌓아올려 만든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석비형과 목주형이 주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장생표는 통일신라시대인 759년(경덕왕 18) 장흥의 보림사(寶林寺)에 세워졌던 석비형 장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영암의 도갑사(道岬寺)에 2개, 청도의 운문사(雲門寺)에 11개,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12개, 안악의 연등사(燃燈寺)에 2개, 원주의 봉은사(奉恩寺)에 1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1개의 장생표가 있었다. 이 중 1개의 도갑사 장생과 12개의 통도사 장생표는 국가 또는 왕의 명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서 특별히 국장생(國長生)이라 부른다.
이러한 여러 장생표 중에서 통도사의 12국장생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 국장생은 고려시대인 1085년(선종 2)에 통도사측의 요청에 의해 호부가 첩문을 내려 건립하게 한 것으로서, 사찰 입구에는 2개의 목장생표가 세워져 있었고 사방에 6개의 석비형과 4개의 석적형 장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하북면 답곡리 솔래천[孫仍川]에 세워졌던 석장생표가 현전하여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높이가 166㎝이고 너비가 60㎝인 화강석 석주(石柱)에 2∼3.5촌(寸) 크기의 해서체(楷書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석비형으로서, 그 설치 경위가 이두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솔래천의 것과 같은 해에 세워지고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석비형 장생이 밀양군 하서면 무안리와 울주군 삼남면 상천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전자는 일제침략기에 일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후자는 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