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는 1775년(영조 51)에 개축(改築)되었다고 전한다. 문간채는 안행랑채에 해당하는 건물로 본래 안채 쪽으로 조금 더 들어와 배치되어 있었으나 재축 때 지금의 위치로 이동했으며, 지금의 문간채 우측에 2칸 규모의 대문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의 문화재(현, 국가유산) 지정 당시 명칭은 ‘장흥위계환가옥(長興魏桂煥家屋)’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고택으로 장흥위씨의 집성촌에 위치해 그의 호를 따라 ‘장흥 존재고택(長興 存齋古宅)’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2007.01.29.).
이 집의 대지는 마을길에서 갈라진 좁은 고샅으로 접근된다. 집 앞에는 석가산을 둔 연못이 있고 집 뒷쪽 후원에는 대나무숲이 있으며 그 사이로 실개천이 흐른다. 뒤뜰에 세운 안채 굴뚝은 벽을 기와로 쌓아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집의 배치는 안채, 사랑채, 문간채, 헛간채 등 일자형 채들이 좌우로 긴 장방형의 안마당을 둘러싸는 튼ㅁ자형이다.
남서향으로 자리한 안채는 2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으며 안방 앞에 있는 6단의 계단으로 접근한다. 안채는 깊이(보) 방향으로 두 칸을 배열한 겹집이며 정면과 양측면에 퇴를 두었다. 앞에서 보아 왼쪽부터 부엌/고방, 안방, 안대청, 작은방/뒷방 순으로 배치되었다. 부엌을 제외한 실들의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했으며 안방과 안대청의 뒤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었다. 작은방 옆의 툇마루는 골방으로 변경하였고 그 뒤는 함실이다. 안채는 중앙에 4칸(전면, 깊이 각 두 칸)의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실들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칸마다 전면에는 네짝 여닫이 격자살문, 후면에는 두짝 판문을 설치하였다. 부엌 옆(북서쪽)에 장독대가 있다. 가구는 1고주 7량 구조, 지붕은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이다.
안채 바로 앞에 있는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존재 위백규가 서재로 사용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1칸 사랑방의 앞과 옆(남동쪽)에 퇴가 부가된 형태이다. 안채와 근접해 있지만 안채 쪽과 안마당 쪽으로는 개구부를 설치하지 않아 시선이 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가구는 1고주 5량 구조이며, 지붕은 앞에서 보아 왼쪽은 팔작, 오른쪽은 맞배 기와지붕이다. 사랑채 앞에는 사랑마당이 담으로 둘리어 있다.
안채 맞은편에 전면 4칸, 측면 1칸의 문간채가 있다. 평대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문간방과 곳간(예전에는 마굿간이었으며 지금은 부엌으로 만듦)이 있고 오른쪽 칸은 현재 욕실로 쓰인다. 가구는 3량 구조, 지붕은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헛간채는 안채 옆 북서쪽에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2칸에 초가지붕을 이은 건물이다. 본래 곳간과 외양간이 있었으나 지금은 방과 화장실로 만들었다. 가구는 2고주 5량 구조이다. 사당은 안채의 뒤(동쪽) 계단으로 올라가는 높은 곳에 있다. 1칸 공간에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가구는 1고주 5량 구조로, 전면 기둥 상부는 익공식 결구를 하였다. 사당의 지붕은 맞배 기와지붕이며, 양측에 곡선형의 풍판을 설치하였다.
지형의 흐름에 맞게 안채와 안마당를 배치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랑채, 헛간채, 문간채 등 여러 채와 그에 대응하는 마당을 구성한 이 집은 한옥의 보편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겹집 구성으로 많은 공간을 확보한 점, 안채와 사랑채를 근접시켜 원활하게 연결되도록 한 점, 그리고 집의 앞 뒤에 풍부하게 조경을 한 점이 이 집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