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영조 52)에 삼수부사(三水府使)와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1726~1799)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이곳은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져 있는 형국인 금환락지(金環落地)라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대지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이는 1865년(고종 2)에 원래의 것을 더 깊게 판 것이라 한다.
안채의 추녀에 1916년에 중수(重修)한 기록이 있고 큰사랑채 또한 몇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였으나 모두 대체로 초창(初創) 때의 규모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안 행랑채 · 중간 사랑채 또한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유이주가 1793년(정조 17)에 쓴 분재기(分財記)인 「장자구처기(長子區處記)」에 행랑채는 대문간 양쪽에 행랑 칸수가 각각 12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동쪽 11칸, 서쪽 7칸이다. 중간 사랑채의 귀래정(歸來亭)과 행랑채를 연결했던 4칸의 바깥 사랑채가 있어 하인들이 기거했으나 1901년(광무 5)에 철거되었다.
집의 구성은 맨앞에 행랑채, 튼ㅁ자형을 이룬 안채 · 안 행랑채 · 중간 사랑채(안사랑채), 여기에 서쪽으로 연결된 (큰)사랑채, 북동쪽 가장 뒤에 있는 사당채로 이루어졌다. 모든 채는 앞에 마당을 두고 있고 안채 부엌의 서쪽에는 우물이 있는 부엌 마당이 조성되었다.
솟을대문칸이 설치된 행랑채는 19칸의 긴 건물로 대지의 앞쪽 경계선에 위치해 대지의 전면을 가려 준다. 사랑채는 대청 서쪽으로 누마루가 돌출되고 뒤로 마루방과 온돌방이 이어져 T자형을 이룬다. 사랑채의 가구는 3량구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마당은 사랑채의 부엌을 겸한 중문간으로 진입한다. 안채는 각각 전면 2칸의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부엌과 건넌방으로 구성된 몸채를 중앙에 둔 ㄷ자 집인데 앞의 안 행랑채 · 중간 사랑채와 함께 안마당을 에워싸고 있다. 안채의 가구는 5량구조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안채와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사용했다. 안 행랑채는 일자형 곳간으로 그 서쪽 끝에 중간 사랑채가 결합되어 있다. 중간 사랑채는 한 칸 누마루를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서쪽 벽에는 난간을 설치했는데 이 누마루에 귀래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서쪽 아래에 안채로 들어가는 경사로가 있다.
구례 운조루 고택은 조선 후기 양반집의 건축 형식을 잘 보여 주고 있고 생활양식에 잘 대응하도록 공간을 독특하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 집은 대체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여 주는, 부감기법으로 그린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 이 집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 「장자구처기(長子區處記)」 등이 전해져 당시의 생활상이 잘 나타난다. 또한 「청주성도(淸州城圖)」, 「상당산성도(上黨山城圖)」 등 상당수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