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영모재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충청북도 영동군에 있는 재실이다. 1826년 남주한이 지은 고성 남씨의 재실이다. 마을길에 면한 곳에 대문채와 재실이 앞뒤로 나란히 북서향으로 배치되었다. 앞에 대문채를 두고 옆(남쪽)에 협문을 설치했으며 한식 토석담으로 부지 주변을 둘렀다. 대문채는 세 칸 집인데 가운데 칸에 솟을대문을 설치했다. 재실은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졌다.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 한 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영모재는 전통 온돌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영모재(永慕齋)는 고성 남씨(固城南氏)의 재실(齋室)로, 1826년(순조 28) 남주한(南周漢)이 선대의 묘소 아래에 지었다.
1888년(고종 25)에 수리한 뒤, 1929년에 중수(重修)하고 남정우(南定祐)가 중수기(重修記)를 지었다. 재실의 옆(북쪽)에 고직사(庫直舍)가 있고 블록담이 앞으로 벌어진 사선으로 있었으나 근래에 고직사를 철거하고 담을 재실의 측면과 나란히 쌓았다.
영모재는 야산 자락, 초강천을 바라보는 평탄한 지형에 자리한다. 마을길에 면한 대지에 대문채와 재실을 앞뒤로 나란히 북서향으로 배치하였다. 앞에 3칸의 대문채를 두고 옆(남쪽)에 한 칸의 협문(夾門)을 설치했으며 한식(韓式) 토석(土石) 담으로 부지 주변을 둘렀다. 왼쪽의 담을 앞으로 돌출시켜 쌓아 대문채 앞에는 공간의 여유가 생겼다. 대문채는 3칸 집인데 가운데 칸에 솟을대문을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3량 구조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 기와 지붕이다. 대문채 옆(북쪽)에는 우물이 있다.
재실은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졌다. 가운데 2칸 폭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 한 칸 폭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낮으나 건물 바닥이 높아 대청 앞에, 기단에서 건물로 오르는 한 칸 폭의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재실은 깊이(보) 방향으로 2칸을 배열한 겹집인데, 앞에서 보아 왼쪽 온돌방은 앞 반 칸을 툇마루로 구성하였다. 이 온돌방 앞과 대청 앞 한 칸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뒤와 오른쪽 온돌방 옆에는 쪽마루를 설치해 외부와 원활히 연결되도록 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이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 기와 지붕이다. 아궁이는 측면 기단 부위에 있지만 굴뚝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영모재는 재실 건물, 토석담과 솟을대문, 현판, 상량문(上樑文)과 중수기 등의 관련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는 재실이다. 굴뚝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특이한데 온돌방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아궁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여 열효율을 극대화하도록 고안했다고 한다. 1938년경 온돌을 해체해 본 결과, 온돌 아래 사방에 물이 담겨 있는 옹기가 묻혀 있었으며, 온돌 구조가 이중 구들로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므로 영모재는 전통 온돌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