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후기에 지어져서 경기도 여주시에 남아 있는 한옥이다. 이 집은 1687년에 지어졌으며, 본래 묘막으로 사용되었다. 이 집에서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 때까지 살았다. 앞에 긴 일자형 행랑채가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안채의 뒤란에는 장독대와 변소가 있고 사랑채 옆에 초가인 별당채가 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양반 가옥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안채의 몸채와 날개채에 각각 큰 저장 공간을 마련한 것에서 애초의 용도인 묘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생가(生家)는 1687년(숙종 13)에 처음 지어졌다. 본래, 이 집은 숙종(肅宗)의 비(妃)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부친이자 명성황후의 6대 조부인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묘를 관리하는 묘막(墓幕)으로 사용되었다. 묘를 관리하던 직계 후손 민치록(閔致祿)이 이 집에서 명성황후를 낳았고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8세 때(1858)까지 살았다. 명성황후는 8세 때 부친 민치록이 타계하였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에서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다. 명성황후의 생가 옆에는 명성황후의 탄강(誕降)을 기념해 1904년(광무 8)에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여러 차례 보수 · 개조 · 중건(重建)되어 현재는 묘막의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렵고 건립 당시의 건물로는 안채만이 남아 있다. 안채는 1975년과 1976년에 중수(重修)되었다. 1996년에는 안채가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집은 마을 뒷산에 민유중의 묘가 있어서 능말이라 불리는 마을에 남서향으로 자리하였다. 앞에 긴 일자형 행랑채가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안채의 뒤란에는 장독대와 변소가 있고 사랑채 옆에 별당채가 있다. 사랑채 방과 안채 마루광 사이, 그리고 사랑채 부엌과 변소 사이에는 협문(夾門)을 설치한 담을 쌓아 별당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한 칸 규모로, 대문간 양쪽에 방과 창고가 있다. 가구는 3량 구조, 지붕은 홑처마 맞배 기와지붕이다. 행랑채 오른쪽에 별동으로 변소가 있다.
안채는 윗방, 대청, 건넌방, 마루광으로 구성된 겹집형 몸채에 윗방에서 돌출한 안방, 부엌, 광, 방이 날개채를 이룬다. 대청과 건넌방의 앞과, 윗방의 옆(북서쪽)은 툇간으로 구성해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날개채는 뒤에 툇간을 둔 후퇴(後退) 집이다. 가구는 몸채가 1고주 5량 구조이고, 날개채는 4량 구조이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과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이어지는 중문간, 대청, 사랑방, 헛간, 그리고 헛간에서 꺾여 이어지는 방 3칸으로 구성되었다. 가구는 3량 구조이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와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별당채는 대청 2칸과 방 한 칸으로 구성되는데 앞 툇간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가구는 1고주 5량 구조, 지붕은 우진각 초가지붕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양반 가옥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안채의 몸채와 날개채에 각각 큰 저장 공간을 마련한 것에서 애초의 용도인 묘막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