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해 내시(內侍)에 보임되었다. 1134년(인종 2)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해 홍주(洪州) 소대현(蘇大縣)에 하천을 팠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적을 막았다.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등과 함께 서적토벌(西賊討伐)을 도모했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1140년 김부식(金富軾) · 임원애(任元敳, 任元厚) · 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언(奏言)을 좇지 않는다며 홀로 사직하였다.
1142년 김부식의 집에 임시로 머물자 간관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아 국자사업 기거주(國子司業起居注)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예부시랑에 승진되었다.
1146년 『서경』의 「대우모(大禹謨)」를 강독하였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任氏)가 의종 대신에 둘째 아들인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이를 막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었으므로 인종이 승선으로 발탁해 동궁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왕이 죽을 때 의종을 잘 보위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148년(의종 2) 한림학사가 되고, 이듬해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로 조정시(趙挺時) 등 인재를 뽑았다.
1151년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는데,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의종의 잘못을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의종은 즉위하면서 새로 내시를 발탁하였는데, 이들 중 주류가 한문(寒門) 출신이었다. 대표적으로 정함(鄭諴)과 영의(榮儀)를 들 수 있다. 의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또한 즉위 초반에 수창궁에서 격구를 관람하거나 직접 격구를 하기도 하였는데, 대간들은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며 정습명의 간언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존중(金存中) · 정함(鄭諴) 등의 무리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병이 들어 김존중이 대직(代職)을 하게 되자 자살하였다. 『동문선』에 세태(世態)를 읊은 「석죽화(石竹花)」등 3편의 시와 2편의 표전(表箋)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