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총의 난 ()

고려시대사
사건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174년(명종 4)
종결 시기
1176년(명종 6)
발생 장소
서경
관련 인물
조위총(趙位寵),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현덕수(玄德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정의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
발단

조위총(趙位寵)은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 무신정권에 대항해서 저항을 일으켰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저항한 일차적 목적은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 등과 같은 집권 무신 세력의 우두머리에 대한 처단이었다. 그 이유는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킬 때, 이의방이 임금을 죽이고 장례도 치르지 않은 죄를 성토한 일이 있었으므로”라고 하였듯이, 집권 무신 세력들의 전횡이었다. 이런 점은 이의방이 제거된 이후 이의방이 처단되었으니 다시 충성하라는 국왕 명종(明宗)의 조서를 받고 조위총이 항복을 표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저항은 비록 무신정권의 전횡에 대한 성토를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였지만, 이를 위해 동북(東北) 양계(兩界)의 재지 세력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전면적인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경과 및 결과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 함경도)와 북계(北界: 평안도)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城)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라고 격문을 돌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에 따라 절령(岊嶺, 황해도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조위총 세력이 저항을 추진하였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지역은 연주(延州,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였다. 이는 연주인 현덕수(玄德秀)와 그의 아버지 도령(都領) 현담윤(玄覃胤) 부자 때문이었다.

중앙 정부에서는 평장사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3군(軍)을 거느리고 서경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崔均)을 동북로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에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절령역(岊嶺驛)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정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저항군에게 대패하여 저항군이 국도 개경(開京)에 육박할 정도였다. 저항군에게 포위된 윤인첨은 저항군과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 정균(鄭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한편 동계(東界)에서는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升)과 조관(趙冠) 등이 화주영(和州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낭장(郎將) 이거(李琚)가 문을 열어 주어 병마사(兵馬使) 대장군(大將軍) 이의(李儀)병마부사(兵馬副使) 최균이 죽었다. 또한 두경승(杜景升)이 동로(東路)에서 서로(西路)로 길을 돌려 북계 몇 개의 성을 점령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절령에서 승리한 저항군이 개경으로 쳐들어 오자, 이의방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저항군을 격파하였다. 당시 그는 서경인 상서(尙書)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저자에 내걸었다. 최숙(崔淑) 등은 적진을 기습해 저항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처럼 승세를 타서 대동강까지 쫓아 서경성 밖에서 진을 쳤으나 이의방이 이끈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중앙 정부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로 삼아 서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관군이 출정 준비를 하던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명을 받은 승려 종참(宗旵)이 이의방을 죽인 일이 발생하였다. 명종이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내세우며 저항군의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위총 세력의 기세는 여전하였다.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별로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청했다가 다시 반발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175년(명종 5)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은 드디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폈다.

주변의 성과 연락이 끊어진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 · 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냈으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 · 이의방의 의종(毅宗) 시해 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보냈다.

그 뒤 서경에서 공방전을 1년여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공격해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무리 10여 명을 가둠으로써 조위총의 저항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재봉기했다가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西北面)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했다가 곧 진압되는 등 서북민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였다.

의의 및 평가

조위총의 저항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조위총의 거병은 무신정권 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의 저항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서북면 지역의 저항은 무신정변을 통한 중앙 정치 세력의 변동과 무신정권에 의한 지방 통제의 강화에 따른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 정부에 의한 지방 통제의 강화는 재지 사회 내의 세력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일반 민은 무신정권의 전횡과 지방 사회 재편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 경제적 모순에 대해 저항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신안식,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경인문화사, 2002)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국학자료원, 1999)
이정신,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91)

논문

서희종, 「고려 무신집권기 조위총 반란의 성격과 그 의미」(『사림』 67, 수선사학회, 2019)
김명진, 「고려 명종대 조위총의 난과 금의 대응」(『동북아역사논총』 46, 동북아역사재단, 2014)
변태섭, 「무신정권기의 반무신란의 성격」(『한국사연구』 19, 한국사연구회, 1978)
변태섭, 「농민·천민의 난」(『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旗田巍, 「高麗の明宗·神宗代に於ける農民一揆」(『歷史學硏究』 2-4·5, 靑木書店,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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