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성훈(性薰), 호는 창암(滄庵). 아버지는 조형규(趙亨圭)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임상휴(任相休)의 딸이다. 송병선(宋秉璿)·송병순(宋秉珣)에게 수학하였다.
1891년(고종 28) 옥천 교동으로 송근수(宋近洙)를 찾아가 『송서차의(宋書箚疑)』 인쇄작업의 교감을 맡았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1905년 송병선이 굴욕적인 늑약에 분개하여 자결하니 심상(心喪)으로 기년(朞年)을 마쳤고, 스승의 유고를 간행하였다.
송병순이 만동묘(萬東廟)를 복향(復享)하는 데에 적극 참여하였고, 1910년 이후로는 소화둔인(小華遯人)이라 자칭하고 경전(經傳)과 정주서(程朱書)를 탐독하면서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이기설(理氣說)에 대해서는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하였다. 저서로는 『동사기략(東史記略)』·『조씨문헌고(趙氏文獻考)』·『창암집(滄庵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