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계(金溪). 자는 군선(君善). 처음 호는 희헌(羲軒), 뒤에 송석원(松石園) ·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꾸었다.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독서를 좋아하고 시공부에 힘썼다.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위항(委巷)의 부호들이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투어 초청했다. 학생이 모두 50∼60명이나 되어 반을 나누어 교육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르치는 법도가 매우 엄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중인이나 상인은 재산을 모으고 지위 상승을 꾀하는 단계에 이렀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과 한시문(漢詩文)의 교육을 절실하게 요청했다.
인왕산 옥류천(玉流泉) 송석(松石) 아래에다 초가집을 마련하고 ‘송석도인’이라 자처하며 동인(同人)들을 모아 시를 읊었다. 당시 시인으로서 이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유명했다.
1786년(정조 10) 여름에 결성된 이 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 옥계시사(玉溪詩社) · 서사(西社) 혹은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했다. 이는 뒤에 중인층 시단의 모체가 됐다. 당시 송석원시사에 참여한 사람은 장혼(張混) · 조수삼(趙秀三) · 차좌일(車佐一) · 김낙서(金洛瑞) · 왕태(王太) 등이었다. 차천로(車天輅)의 후손인 차좌일과 특히 친한 사이였다.
천수경은 1791년에 시사에서 읊은 시를 모아 『옥계아집첩(玉溪雅集帖)』을 만들었으며, 1793년에는 송석아회(松石雅會)를 개최한 뒤에 시첩을 만들었다. 그는 1797년에 333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한 『풍요속선(風謠續選)』을 간행하여 『소대풍요(昭代風謠)』 이후 60년간 위항문학이 성장한 자취를 보여주었다.
또한, 차좌일 · 장혼 등과 함께 위항문학의 전성기에 가장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천수경이 죽은 뒤에 묘비에는 ‘시인천수경지묘(詩人千壽慶之墓 : 시인 천수경의 묘)’라고 새겼을 만큼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시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풍을 띠고 있다는 평을 얻었다. 문집은 없고 『풍요속선』에 시 7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