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는 19세기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화가[畵僧]로, 당호는 금암당(錦巖堂)이다. 그는 수행에도 힘써 선사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전해지며, 50여 년에 걸쳐 불화를 제작하였고 현재 37건의 불화가 알려져 있다.
천여는 1794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 15세인 1808년 선암사에서 출가하였다. 2년 후인 17세에 구족계를 받고 이때부터 도일화사(道鎰畫師)로부터 불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7세인 182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하여 50여 년간 활발하게 불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화승으로서뿐만 아니라 선사로서의 수행에도 힘썼으며, 가타송(伽陀頌: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지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878년 9월 85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천여는 27세에서 78세에 이르기까지 약 50여 년에 걸쳐 활발하게 불화를 제작하였다.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평생 동안 팔도총림의 불사에 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여서 경상도 등에도 그의 불화가 남아 있으며, 석가모니불도·아미타불도·관음 및 지장보살도·삼장보살도·시왕도·신중도·치성광여래도·산신도 등 다양한 주제의 불화를 그렸다. 또한 불화를 직접 제작하는 일뿐 아니라 화주(化主: 불사 조성 비용을 마련하는 승려), 증명(證明: 불화가 법식대로 그려지는지를 증명하는 승려) , 시주(施主: 불사 비용을 대는 사람) 등의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천여의 화업 활동은 크게 4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1810년부터 약 20년 간으로, 주로 보조화사로서 불화를 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적지만, 1822년에 제작된 흥국사 도솔암 〈신중도〉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스승인 도일이 그린 불화의 밑그림을 그대로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두번째 시기는 1830년부터 약 15년 간으로, 이 시기부터 수화승으로 활동하며 많은 제자들과 함께 전라도 일대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불화로 그가 단독으로 제작한 해인사 〈산신도〉(1831)와 선암사 대승암 〈지장보살도〉(1841), 천은사 〈신중도〉(1833)가 있다. 이 시기에는 진채와 함께 수묵·담채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세번째 시기는 1845년부터 약 15년간으로, 화승으로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라도 이외에 경상도 지역의 불화도 다수 제작하였다. 그의 대표작들이라 할 수 있는 완숙한 기량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는데, 선암사 선조암 〈아미타불도〉(1856), 선암사 지장전 〈지장보살도〉(1849), 장안사 대웅전 〈석가모니불도〉(1856) 등이 있다.
이후 말년까지가 네번째 시기인데,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붓을 놓지 않고 꾸준히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 중 붉은 바탕에 그린 홍탱이 여러 점 있다.
천여의 맥을 이은 화승으로는 일운(一芸, 日雲, 1841∼1844년 활동)과 태원(太原, 1842∼1847년 활동)이 알려져 있다.
천여의 입적 후 약 40년이 지나 쓰인 「고종문대덕금암대선사전(故宗門大德錦巖大禪師傳)」이라는 전기가 남아 있어 그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에는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이 1864년에 찬한 천여의 진영이 남아 있어 그의 승려로서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