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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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박종(朴琮)이 지은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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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박종(朴琮)이 지은 기행문.
내용

조선 후기에 박종(朴琮)이 지은 기행문. 작자의 문집인 『당주집(鐺洲集)』 권15 유록편에 실려 있다. 「청량산유록」은 일기체로 노정순(路程順)에 따라 쓴 것이 특징이다. 1780년 8월 2일, 박종은 붓과 벼루·지팡이만 휴대하고, 박종명(朴宗溟)은 책·동전 등의 몇 가지를 가지고 함께 떠났다. 그들은 그날그날 시를 지으며 유람한 감회를 읊었다.

시 부분은 이 유록에는 실려 있지 않고 시권(詩卷)에 따로 실려 있다. 박종과 박종명은 미곡천(美谷川)-옥천재사(玉川齋舍)-백곡(栢谷)-한천주점(寒川酒店)-임계(臨溪)를 거쳐, 단곡(丹谷)까지 가서 묵었다. 청량산으로 가는 직행길을 잃고 태백으로 가서 귀로에 청량산을 거쳐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재산(才山)에서 물이 불어서 길을 우회해서 청량산으로 갔다. 인곡(仁谷)에서 고개를 넘으면 고성(古城)이 있다. 이 성의 동남쪽 절벽에서 서북 산두(山頭)의 성축(城築) 중에 청량산이 있다. 청량산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온 곳이다. 남쪽 고개에 궁전 옛터가 있고 그 밑은 천길 절벽이다.

고려왕이 피난을 왔을 때에 죽여야 할 죄인이 있으면 처형하지 않고 이 절벽에 던졌다. 그러므로 이 절벽 아래에는 지금도 백골이 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고 전한다. 그래서 날씨가 궂은 날이면 귀신의 울음소리가 난다고 한다. 영서로부터 5리를 내려가서 북쪽으로 꺾어져 몇 리를 들어가면 절벽 좌우에 고목과 등나무가 보인다.

해와 달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이 주변이 모두 청량산 경계이다. 박종과 박종명은 공전암(供殿菴)·육화전(六和殿)·명부좌암(冥府座庵)·포단산(蒲團山)·외청량(外淸凉)·어풍대(御風臺)와 최치원(崔致遠)이 바둑을 두었다는 고운대(孤雲臺), 총명수(聰明水), 동석(動石), 김생(金生)이 금자(金字)로 불경을 썼다는 김생굴, 백월선사비본(白月禪師碑本), 만월암, 자소봉(紫宵峰), 백운암(白雲菴) 옛터, 육화암(六和菴), 연대(蓮臺) 좌우의 열두 기봉(奇峰)과 열두 기대(奇臺)와 다섯개의 기이한 굴(窟)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이 것을 기록하였다.

청량산은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다. 주세붕(周世鵬)이 청량산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황(李滉)이 젊었을 때에 백운암에서 독서하며 「백운암기」를 지었다. 만년에는 집과 친구도 돌아보지 않고, 청량산으로 들어와 며칠씩이나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산을 두고 시부(詩賦)를 지어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했다고 한다.

박종과 박종명은 귀로에 봉화(奉化)의 초방사(草房寺)-수월암(水月菴)-거초사(去草寺)-한수정(寒水亭)-각화사(脚化寺)를 거쳐 국사(國史)의 사고를 둘러보고는 청량산을 평하여 단엄(端嚴), 상개(爽介)하다고 적었다. 다음에 순흥의 부석사, 백운동서원과 경렴정(景濂亭), 취한정(翠寒亭)을 둘러보았다.

구성(龜城), 도산서원(陶山書院), 조목(趙穆)의 땅과 이현보(李賢輔)의 애일당(愛日堂)을 둘러보고 다시 백곡으로 돌아온다. 「청량산유록」은 1780년 8월 2일부터 8월 24일까지 23일간 유적지 23군데와 왕복 680리를 유력(遊歷)한 기록이다.

이 기행문은 청량산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 등지에 산재한 문화재 및 문헌·전고(典故)·풍토요속(風土謠俗)·구비문학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당주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참고문헌

『당주집(鐺洲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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