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는 세종 때 발명되어 사용한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우량 측정기구이다. 1440년(세종 22)을 전후하여 발명되어 1442년부터 20세기 초 일제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될 때까지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우량 관측기구로 사용되었다. 현대의 우량계에 해당한다. 금속제 원통형 그릇에 빗물을 받아 표준화된 눈금의 자로 그 깊이를 측정했다. 같은 규격의 기구와 자를 서울의 천문관서와 지방의 관아에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우량을 관측하고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어 기록을 보유했다. 첨성대, 금속활자, 한글 등과 함께 한국사의 빛나는 과학적 성취로 평가된다.
1440년을 전후하여 발명되어 1442년(세종 24)부터 20세기 초 일제의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될 때까지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우량 관측기구로 사용된 도구로, 현대의 우량계에 해당한다.
금속제 원통형 그릇에 빗물을 받아 표준화된 눈금의 자로 그 깊이를 측정했으며, 같은 규격의 기구와 자를 서울의 천문관서와 지방의 관아에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우량 관측 및 보고 체계를 갖추었다.
우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는 측우기 도입 이전에도 있었다. 비가 온 뒤에 땅에 비가 스민 깊이를 재어 이를 조정에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41년(세종 23) 4월 29일(음력)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왕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문종 임금)이 우량을 측정하는 정확한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양을 재는 방식을 시험하고 있었다. 땅이 빗물에 스민 깊이는 토양의 습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 방법으로는 빗물의 양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 연구의 결과가 그해 8월 호조(戶曹)에 의해 보고되었고, 이후 그릇의 규격 등에 관한 몇 가지 수정을 거쳐 이듬해 1442년(세종 24) 5월 8일(양력 6월 15일) 측우기를 이용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 및 보고 제도가 확정되었다. ‘측우기’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측우기는 주철(鑄鐵)로 된 원통형 그릇으로, 깊이 1자 5치(약 31㎝), 지름 7치(약 15㎝)로 규격이 정해졌다. 1441년의 원래 구상에 따르면, 깊이 2자, 지름 8치의 그릇으로 좀 더 크게 만들 계획이었으나, 아마도 2자(약 41㎝) 깊이로 빗물이 차는 일이 거의 없고 또 빗물을 측정하기에는 그릇이 너무 깊어 규격을 더 편리하게 줄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측우기를 돌로 만든 측우대(測雨臺) 위에 올려놓고 비 온 뒤 그 속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주척(周尺)으로 읽는데, 푼(分, 약 2㎜) 단위까지 정밀하게 재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에는 이상과 같은 표준으로 제작된 측우기와 주척을 중앙의 천문 관서인 서운관(書雲觀)과 팔도의 감영(監營)에 나누어 주고, 그 이하 행정 단위의 관아에서는 이를 모델로 하여 자기(磁器) 또는 와기(瓦器)로 측우기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하였다.
서운관의 관원과 팔도 감사 및 각 고을의 수령들은 비가 오면, 비 오고 갠 시간과 주척으로 푼 단위까지 측정한 빗물의 수심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훗날에 참고하기 위해 그 기록을 남겨두도록 규정했다.
이때 반포된 제도에 따라 우량을 관측하고 보고하는 일이 16세기 말 임진왜란 직전까지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몇몇 남아 있다. 서운관이 서울의 우량을 측우기 수심으로 보고한 기록과 전라감사 등 각 도의 감사가 산하 고을의 강우량을 측우기 수심으로 보고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을 겪으며, 측우기 관련 제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를 거치며 측우기는 물론 이를 이용한 우량 관측 보고 자료도 대부분 사라졌다.
측우기 제도가 부활한 것은 1770년(영조 46) 5월이다. 당시 영조는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을 통해 조선 왕조의 역대 전적과 제도를 정리하고, 조선 초기 임금이 만든 제도를 부활하여 왕조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영조는 특히 세종대에 갖추어진 천문과 기상 관측 제도를 부흥시키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측우기 제도 복원 사업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영조는 『세종실록』에 기록된 측우기의 규격과 관측 및 보고 제도를 거의 그대로 준수하였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전국의 모든 고을에까지 측우기를 설치했던 세종 때와는 달리 영조는 서울의 궁궐과 서운관, 팔도 감영, 강화와 개성의 유수부에만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후 측우기를 이용한 관측 및 보고는 1907년 일제의 조선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도입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매일 매일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140년간의 서울 우량 기록은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의 우량 관측 기록이다.
그 외에 팔도 감영과 유수부 등 지방의 관아에서 올린 우량 기록도 상당량이 남아 있다. 이 보고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집 · 영인한 『각사등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140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지속적인 우량 관측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영조와 정조를 비롯한 국왕이 엄격한 우량 관측 및 보고 규칙을 정하고, 그것이 지켜지도록 독려했기 때문이다. 이미 1442년 서울의 서운관과 지방관들에게 비가 오고 그친 시각과 측우기 수심으로 잰 우량을 보고하도록 규정을 세웠고, 이것이 조선 후기에도 준용되었다.
하지만 심한 가뭄 끝에 비가 왔다거나 기타 비상한 상황에서 국왕은 준칙을 무시하고 변화하는 상황을 수시로 상세히 보고하도록 지방관을 독려했다.
1818년(순조18)년에 간행된 『서운관지』에는 서울의 천문관서 서운관의 측우기 관측 규칙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비가 오면 하루를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그리고 다음 날 새벽까지 두 구간으로 나누어 우량을 관측 보고하도록 했다. 정조 임금은 한 때 이 규정을 더 강화하여, 하루를 세 구간으로 나누어 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왜 측우기를 통한 우량의 측정과 보고 제도를 만들고 이를 지키려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치된 의견이 없다. 다수의 견해는 측우기라는 표준적 기구를 통해 측정한 전국의 우량을 수합하여 농정의 합리화를 꾀했다는 입장이다.
1442년 측우기가 도입된 이후, 농사의 풍흉을 감안하여 세율을 조정하는 연분등제(年分等制)가 도입된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측우기의 우량 수치를 통계 처리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를 농정의 합리화와 과학화를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입장에 따르면, 측우기는 비를 비는 기우제의 도구, 또는 하늘이 내린 비의 양을 통해 국왕의 정치에 대한 하늘의 평가를 엿보는 점성술의 도구였다.
1904년 러 · 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파견되어 이후 일제의 조선통감부 및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을 역임한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조선 왕조의 천문 · 기상관측 제도와 관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측우기와 이를 이용한 관측 기록을 발견했다.
이후 그는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를 포함한 몇 편의 보고서를 통해, 조선이 유럽보다 앞서 측우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서울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최장기 우량관측 기록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렸다.
와다 유지는 당시 남아있던 측우기 관련 유물을 수집 · 조사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경복궁 내 서운관과 함흥, 대구, 공주의 감영에 설치 된 측우기를 직접 보았거나 수집했으며, 측우기는 사라지고 측우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창덕궁 규장각, 경상남도 통영을 비롯한 몇몇 사례를 확인했다.
이 중 금영측우기로 불리는 공주의 충청감영 측우기는 이후 와다 유지의 귀국 때 일본으로 반출되어, 1971년에야 다시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2020년 2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로 명칭 변경되면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측우기는 이후 모두 유실되었으므로, 조선 측우기의 현존하는 유물로는 현재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는 금영측우기가 유일하다. 측우대로는 현재 관상감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통영 측우대 4기가 남아 있다.
와다 유지의 선구적 연구 이후 일제 강점기 한국의 민족주의 지식인과 홍이섭, 전상운 등 초창기 과학사 연구자들은 측우기를 첨성대, 금속활자, 한글 등과 함께 한국사의 빛나는 과학적 성취로 간주하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일부 중국학자들이 측우기가 중국에서 발명되어 조선에 하사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은 1770년 영조 임금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측우기 대석에 ‘건륭(乾隆)’이라는 당시 청나라 황제의 연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 외에는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물론 당시 조선의 공식 문헌이 대개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것이 측우기 중국 발명설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측우기 중국 발명설은 1996년 서울에서 열린 제8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회의에서 과학사학자 박성래에 의해 체계적으로 비판되었다.
15세기에 비의 양을 인공적인 기구에 받아 정밀한 수치로 측정한 일은 세계 과학사에서 볼 때 매우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는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는 비견될 만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서양의 경우도 17세기가 되어서야 갈릴레오(Galileo), 토리첼리(Torricelli) 등에 의해 정량적인 기상관측 기구가 발명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세종대에 더욱 혁신적인 점은 기구 자체의 발명보다도 표준화된 기구를 이용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 및 보고 제도를 도입한 것인데, 이러한 제도는 전근대시기에 세계적으로 비슷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성과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