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향계는 바람의 방향을 측정하는 기구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기다란 세모꼴 깃발을 긴 대나무 끝에 달아 깃발이 날리는 방향을 보고 풍향을 알았다. 이것을 풍기죽, 상풍간, 더 간단히 풍기라고 불렀다. 궁궐에서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중요한 천문기상 현상으로 간주하여 일상적으로 관측하였다. 현재 창경궁과 경복궁에 남아 있는 풍기대는 각각 198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풍향계는 기상청과 기상대에 설치되어 있다. 풍향계는 지상의 장애물 높이 10배 이상 떨어진 평탄한 곳에서 지상 10m 높이에 설치하는 것이 표준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바람을 관측하기 위하여 기다란 세모꼴 깃발을 긴 대나무 끝에 달아 깃발이 날리는 방향을 보고 풍향을 알았다. 즉 깃발이 동쪽으로 날리면 서풍, 남쪽으로 날리면 북풍이라는 방법이었다. 또한 깃발이 나부끼는 정도나 깃대가 바람 때문에 휘는 정도를 보고 풍속(風速)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풍기죽(風旗竹), 상풍간(相風竿), 또는 더 간단히 풍기(風旗)라고 불렀다.
깃발이 나부끼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는 방법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농사 또는 인체에 바람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랜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바람을 관측한 기록이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면, 깃발로 풍향을 관측하는 일이 고대로부터 행해졌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특히 궁궐에서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일 · 월식, 비, 눈 등의 현상과 함께 중요한 천문기상 현상으로 간주하여 일상적으로 관측하였다. 조선왕조의 천문관서 관상감(觀象監)의 관측 보고서 원부인 『풍운기(風雲記)』에는 1748년 10월 16일의 날씨, 바람의 방향, 관측된 햇무리의 모양이 기록되어 있다.
풍기죽을 이용한 궁궐의 바람 관측은 아마도 조선 초기, 특히 세종대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정황을 알려주는 기록이나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다. 현재 조선 후기 1770년(영조 46)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진 풍기죽의 받침돌 풍기대(風旗臺)의 유물 두 기가 각각 창경궁과 경복궁에 남아 있다.
그 해 5월 1일(음력) 영조는 “궁궐 안과 서운관에 모두 풍기가 있으니, 이는 곧 예로부터 바람을 점치는 뜻이 담겨있다. 옛날에는 풍기를 나무 위에 묶어 놓았으나, 나무는 상하기 쉽다”고 말한 뒤, 창덕궁 통제문(通濟門), 경희궁 서화문(西華門) 안에 돌을 쌓고 풍기죽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보건대, 풍기죽으로 바람을 관측하는 일이 이미 오래된 제도였으며, 그 이전에는 풍기죽을 나무에 설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재 창경궁과 경복궁에 남아 있는 풍기대는 각각 198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었고, 전체 높이는 228㎝( 창경궁 풍기대), 224.3㎝( 경복궁 풍기대)이다. 아래 부분의 대석과 그 위에 세워진 팔각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풍기죽을 팔각기둥 위에 꽂았다.
궁궐에서 쓰이던 풍기죽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모양을 1830년 무렵의 창덕궁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 「동궐도(東闕圖)」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풍기죽은 중희당(重熙堂) 뜰에 측우기와 대각선으로 마주한 위치에 설치된 것으로 그려졌다. 대나무에 길고 가는 깃발을 매달아 놓은 풍기죽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상풍간(相風竿)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사각 기둥위에 꽂혀 있다. 현존하는 창경궁 풍기대가 팔각기둥 모양을 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