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0월경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 석수암에서 기삼연이 결성을 주도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이하, 회맹소]는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가 주도하고 기삼연이 참여했던 일심계(一心契)라는 계 조직과 장성의 유림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었다.
주요 참가자는 대장[또는 맹주] 기삼연, 통령 김용구 외에 참모(參謀) 김엽중(金燁中) · 김봉수(金鳳樹),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 · 서석구(徐錫球), 선봉장(先鋒將) 김준(金準), 중군장(中軍將) 이철형(李哲衡), 후군장(後軍將) 이남규(李南奎), 운량장(運糧將) 김태수(金泰洙),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李英華), 좌익장(左翼將) 김창복(金昌馥), 우익장(右翼將) 허경화(許景和), 포대장(砲隊將) 김기순(金基淳), 포사장(砲射將) 박도경(朴道京), 호군장(犒軍將) 유병순(柳炳珣)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장성 · 영광 · 고창 등 호남 중서부에서 거주하였고, 상당수가 이 지역의 저명한 유림 지도자인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었다. 특히 기삼연은 기정진의 재종질(再從姪)이면서 그보다 5살 많은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의 삼종숙(三從叔)이었다. 이들은 유교 특유의 춘추의리(春秋義理)에 투철하였고, 배외의식(排外意識)이 강한 양반 유림이었다.
회맹소의 활동이 나날이 기세를 떨치자, 이 지역에서는 조세를 거둘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 측은 1908년 1월 25일부터 11개 부대를 편성하여 3월 초까지 회맹소에 대한 대규모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기간에 회맹소는 2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추위를 피하고 최대의 명절인 설을 보내기 위해 담양 추월산(秋月山)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지내려던 회맹소의 계획이 일본 측에 발각되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의병장 기삼연도 부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기삼연은 회맹소를 김용구에게 맡기고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전라북도 순창에 은신하였으나, 1908년 2월 2일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기삼연을 광주로 압송한 뒤, 정식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2월 3일 처형하였다. 이로써 기삼연이 주도하던 호남창의회맹소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회맹소의 활동은 김용구를 비롯해 김준, 이철형, 김기순, 박도경, 이영화, 김공삼(金公三), 김율(金聿) 등에 의하여 지속되었다. 이 밖에도 회맹소의 과감한 반일투쟁에 고무되어 의병을 일으키려는 세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회맹소는 1907년 10월 말부터 1908년 1월 말까지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회맹소는 대외 선전과 반일 무장투쟁을 병행하였다. 미곡 유출 방지, 외래품 판매 금지, 납세 거부, 자위단(自衛團)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도 편지를 보내 창의(倡義) 사실을 널리 알려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사원들을 ‘인의(仁義)로 성벽을 삼고, 필묵(筆墨)을 무기로 삼으니 시골 군사 10만 명보다 나을 것’이라고 격려하였고, 격문(檄文)을 반드시 게재함으로써 항일 의식이 널리 고취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격문에서는 '이집트나 오키나와[沖繩]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일제히 궐기하자.'고 하였다. 또한, 일본인에 대해 현상금을 걸고 주민, 심지어 순검이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이라 하더라도 일본인의 머리를 베어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겠다고 고시하였다. 이 밖에도 회맹소의 봉기에 관한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 「전령(傳令)」, 「광고문(廣告文)」, 「축문(祝文)」 등이 남아 있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은 1907년 10월 30일 무장분파소(茂長分派所) 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고창읍성을 점령하여 장기적인 항전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며, 12월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를 공격하여 쌓아 둔 세곡(稅穀)을 빼앗아 일부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비축하였다.
장성읍과 영광읍을 점거하여 분파소 · 우편취급소 · 군아 · 세무서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살해하였다. 1908년에 들어서도 담양 · 함평 · 고막원(古幕院) 등에 있는 일본 관련 기구를 습격하였으며, 전라도의 중서부 지방인 장성 · 영광 · 담양 · 고창 · 함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회맹소의 병력은 약 400∼500명 규모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