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선(應善). 홍귀손(洪貴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아버지는 홍덕윤(洪德潤)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사성 유의신(柳義臣)의 딸이다. 홍인서(洪仁恕)와 홍인헌(洪仁憲)의 형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으며, 이후 1553년(명종 8)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홍문관부수찬·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좌랑·홍문관교리, 의정부의 검상·사인, 예빈시정·홍문관부응교·사부시정·홍문관의 전한·직제학 등을 두루 거쳤다. 1565년 사헌부집의로서 이량(李樑)의 당이 몰락할 때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을 구호해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한 일로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이후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 때 당대의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잡아 추국(推鞫)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형조참의를 거쳐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그 뒤 예조참의와 좌부승지를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어 언관의 수장으로서 “임금이 신하의 말을 모두 포용하면 상하의 정이 서로 통하게 될 것이다.” 하여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간원의 잘못에 대한 홍문관의 지적과 연이은 사헌부의 탄핵으로 체직(遞職: 관직이 교체됨)되었다가 바로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후 우부승지·대사간·부제학을 거쳐 다시 대사간을 역임하다가 44세로 졸하였다. 당시 사론에서 자품이 온아하고 마음 씀씀이가 너그러우며 일을 잘 처리한다는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