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우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응선(應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5년(중종 20)
사망 연도
1568년(선조 1)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 관직
예빈시정|홍문관부응교|우부승지|대사간|부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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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우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선(應善). 홍귀손(洪貴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아버지는 홍덕윤(洪德潤)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사성 유의신(柳義臣)의 딸이다. 홍인서(洪仁恕)와 홍인헌(洪仁憲)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으며, 이후 1553년(명종 8)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홍문관부수찬·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좌랑·홍문관교리, 의정부의 검상·사인, 예빈시정·홍문관부응교·사부시정·홍문관의 전한·직제학 등을 두루 거쳤다. 1565년 사헌부집의로서 이량(李樑)의 당이 몰락할 때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을 구호해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한 일로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이후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 때 당대의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잡아 추국(推鞫)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형조참의를 거쳐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그 뒤 예조참의와 좌부승지를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어 언관의 수장으로서 “임금이 신하의 말을 모두 포용하면 상하의 정이 서로 통하게 될 것이다.” 하여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간원의 잘못에 대한 홍문관의 지적과 연이은 사헌부의 탄핵으로 체직(遞職: 관직이 교체됨)되었다가 바로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후 우부승지·대사간·부제학을 거쳐 다시 대사간을 역임하다가 44세로 졸하였다. 당시 사론에서 자품이 온아하고 마음 씀씀이가 너그러우며 일을 잘 처리한다는 평을 받았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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