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추(應推). 홍귀손(洪貴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아버지는 홍덕윤(洪德潤)이며, 어머니는 유의신(柳義臣)의 딸이다. 형은 부제학을 지낸 홍인경(洪仁慶)이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의정부가 작성한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1583년 사간원헌납이 되어 이이(李珥)의 거조(擧措)가 온당하지 못하며, 정철(鄭澈) 또한 사류들을 잘 모함한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이어 인척인 민정명(閔定命)이 장령이 되자 상피(相避: 일정한 인척 관계에 있는 자는 같은 소속의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함.)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민정명에게 외방직을 맡게함으로써 인서도 계속 지평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예조정랑·사헌부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여 간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가 경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해 오자 당시 개성부유수로서 동요하던 백성들을 효유하여 안정시켰으나 곧바로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1593년(선조 26) 호조참의가 되었지만 전란의 와중에서 병을 이유로 동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