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화보(和甫). 황준원(黃浚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순경(黃舜卿)이고, 아버지는 언양현감 황선(黃瑄)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황임(黃琳)의 조카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이어 158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와 예문관봉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민심 수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594년 경기지방의 어사가 되어 전쟁 중에 기승을 부리고 있던 도적의 심각한 폐해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1598년 상주목사로 재직 당시 병이 매우 심한데도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하던 중 홍진(洪進)의 간언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당시 전쟁의 와중에서 피해가 극심하고 위험지역이던 양남(兩南)지방에 수령들이 부임하기 싫어하던 상황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 염려되어 감히 면직을 청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600년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아 경연학사로 선발되었고, 이후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사회적 혼란으로 토적이 성행하던 상황에서 대흥(大興)에 있던 중 불행히도 토적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5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