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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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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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집이나 궁궐 · 절 등의 집 뜰에 층계 모양으로 단(段)을 만들고 단마다 화초를 심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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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살림집이나 궁궐 · 절 등의 집 뜰에 층계 모양으로 단(段)을 만들고 단마다 화초를 심은 시설.
내용

≪목은집≫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말기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계는 우리 나라 정원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의 집이 주로 뒤에 동산을 두는 까닭으로, 동산의 비탈진 면을 이용하여 꽃을 심게 될 때 자연히 단이 이루어져 손쉽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궁궐과 같이 위엄 있는 건축에서는 잘 다듬은 장대석돌을 바른층쌓기로 쌓아 화계의 앞면을 마무리하고, 윗면은 흙바닥으로 하여 이곳에 꽃을 심었다.

일반주택이나 사찰·정자 등에서는 사고석을 바른층쌓기하거나 막돌들을 허튼층쌓기로 쌓아 마무리한다. 화계에는 꽃만 심는 것이 아니라 때로 큰 나무도 한 두 그루 심는데 이때 나무 밑둥이 차지하는 부분만큼 넓게 화계 앞면의 배를 불리기도 한다.

또 큰집이나 궁궐의 화계, 특히 뒷뜰에 화계를 꾸밀 때에는 화계 위에 석함이나 식석(飾石)·대석(臺石)·돌확[石確] 등의 석물을 놓기도 하고 굴뚝을 세워 장식하기도 한다. 궁궐의 뜰에 만들어진 화계 중에서 가장 잘 꾸며진 것은 창덕궁 낙선재의 뒷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화계에는 꽃들 이외에 석물들과 굴뚝들이 늘어서 있어 제일 위쪽에 쌓아올린 담장과 함께 빼어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또 창덕궁 금원(禁苑) 안에 건축된 연경당 선향재의 뒷뜰 화계는 사고석으로 마무리하였는데 화계 위터에 세운 아담한 정자 농수정과 함께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풍수설이 집터 선정의 중요한 길잡이 구실을 해왔다. 풍수설에 의하면 “택지는 모름지기 왼쪽에 흐르는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청룡(靑龍)이라 하고, 오른쪽에는 긴 길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백호(白虎)라 한다.

또한 앞에는 못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주작(朱雀)이고, 뒤에는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현무(玄武)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땅이라야만 택지로서 가장 귀한 땅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요약하여 보면 집터는 뒤가 높고 앞이 낮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향 땅의 경우, 이러한 지형은 양지바를 뿐만 아니라 겨울철에는 찬 북풍이 가로막히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바람이 잘 닿아, 살기 좋고 건강상에 있어서도 이상적인 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점을 백성들에게 알기 쉽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앞이 높고 뒤가 낮으면 가문이 단절되고, 뒤가 높고 앞이 낮으면 소나 말이 많이 늘어나며, 대대로 영웅호걸이 태어난다(前高後低敗絶門戶 後高前低多足牛馬 必用曰世出雄豪).”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 가리킴에 따라 집터를 정하여 보면 자연적으로 건물 뒷편에는 경사지가 자리하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의 지질은 화강암계(花岡岩系)가 태반이기 때문에 토양은 거의 모두가 질이 가벼운 사질 땅이고 여름철에는 때때로 강한 비가 내린다.

그러므로 건물 뒤편에 자리한 경사지를 그대로 방치할 때에는 빗물로 인한 토사의 유출현상이 생겨나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생각해 낸 것이 경사면에 막돌로 낮게 석축을 쌓아 계단과 같은 모양으로 다듬어놓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토사의 유출을 막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양지바르고 식물의 생육에 알맞기 때문에 차츰 꽃이나 과일나무, 예컨대 앵두나무나 살구나무 따위를 심어 가꾸는 자리로 활용되어갔으며, 이에 따라 화계라는 명칭이 생겨나고 그 꾸밈새도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점차적으로 화려해진다.

특히 유교를 국교로 삼던 조선시대에는 외간남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내당의 뒤편에 자리한 화계는 바깥 출입이 여의치 않았던 아녀자를 위한 위락 공간의 구실을 하였으며 궁궐의 경우에도 왕비의 침전 뒤에 화계가 꾸며졌다. 화계는 일명 화체(花砌)라고도 불렀으며 우리 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정원 기법의 하나이다.

그 원형은 강원도 춘천시 소재 청평사(淸平寺)의 복희암지(福禧庵址) 뒤편 사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꾸밈새는 막돌을 허튼층쌓기로 나지막하게 쌓은 것으로서 3단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층 사이는 원래의 사면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복희암은 고려 중기 초엽에 이자현(李資玄)이 지은 것으로서 이 무렵부터 건물 뒤편의 경사면을 계단상으로 다듬어 토양의 침식을 막는 기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화계라는 용어는 ≪목은집≫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으므로 2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토사의 유출을 막기 위하여 축조되었던 구조물이 꽃이나 과일나무를 심어 가꾸는 자리로 탈바꿈하여왔음을 알 수 있다. 화계는 그밖에도 분경(盆景), 즉 분재를 나열하여 즐기는 자리로도 활용되었다.

또 층의 수와 그 높이는 사면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적절히 정하여졌다. 조선시대 말엽에는 화계의 꾸밈새가 아주 화려하여졌으며, 서유구(徐有榘)에 의하면 연한 노란 빛과 연한 붉은 빛의 돌을 써서 가요문(哥窯文)을 그려내기도 하고 각 단 위에는 반죽(斑竹)으로 난간을 꾸며놓기도 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목은집(牧隱集)』
『산림경제(山林經濟)』
『한국주댁건축』(주남철, 일지사, 1980)
「고려시대의 정원용어(庭苑用語)에 관한 연구」(윤국병, 『한국정원학회지』 1-1,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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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윤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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