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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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 최부자댁 중 안채 앞 정원
경주 교동 최부자댁 중 안채 앞 정원
주생활
개념
갖가지 꽃을 심고 가꾸기 위하여 뜰 한쪽에 평지보다 약간 높게 흙을 쌓아 올려 만든 자리.
내용 요약

화단은 갖가지 꽃을 심고 가꾸기 위하여 뜰 한쪽에 평지보다 약간 높게 흙을 쌓아 올려 만든 자리이다. 지식인들은 화오라는 말을 주로 썼고 일반인들은 꽃밭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을 썼다. 화단의 존재가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고려 중엽부터이다. 이때 화오라는 말이 쓰였는데 조선 시대에도 화오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화단이라는 말은 『고려사』에 한 번 등장한다. 전통가옥은 건물의 배치상 꽃을 심을 만한 자리가 별로 없어서 화단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화단의 예는 경주시 교동 최식의 집이나 경상북도 달성군 박황의 집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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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갖가지 꽃을 심고 가꾸기 위하여 뜰 한쪽에 평지보다 약간 높게 흙을 쌓아 올려 만든 자리.
내용

단은 원래 제터를 가리키는 말로서 주1이나 주2처럼 평지보다 약간 높게 흙을 쌓아 올려 신을 섬기는 자리로 삼던 것으로부터 유래된다.

꽃을 심어 가꾸자면 흙을 갈아엎어야 하고 퇴비와 같은 거름도 넣어주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흙 표면이 주위의 자리보다 약간 높아지게 마련이다. 높아진 흙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한편, 꽃을 돋보이게 하자면 갈아엎은 자리의 주위에 어떤 물체로 구획을 지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고 보면 그 자리가 마치 신을 섬기기 위하여 마련한 단과 흡사한 외양을 갖추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화단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화단이라는 말은 당나라 때에 이미 쓰이고 있었으며, 그와 함께 화오(花塢)나 화포(花圃) 또는 화전(花田) · 화휴(花畦) · 화장(花場) 등의 말도 쓰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화오라는 말이 주로 쓰였고,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꽃밭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널리 쓰여왔다.

꽃을 심어 가꾼다는 것은 정원을 꾸미는 일과 더불어 행해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정원의 축조가 시작되었던 삼국시대에 이미 화단을 꾸미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 중엽부터이고 이 때에 쓰인 말은 화오이다. 고려 후기가 되면서 화장오(花藏塢)라는 말도 보이는데, 이것은 화오와 비슷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도 화오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문종 때(1451)에 간행된 『고려사』에는 단 한번 화단이라는 말이 보인다. 화오의 오(塢)는 낮은 섬을 가리키는 글로서, 꽃을 심어 가꾸는 자리의 주위를 장대석으로 성곽과 같은 모양으로 낮게 둘러싸 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원예 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비롯한 각종 농서(農書)에는 등분법(登盆法)이나 안분법(安盆法) · 배분법(排盆法) 등 꽃을 화분에 심어 가꾸는 방법은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화단을 꾸미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이것은 전통가옥이 건물의 배치 상 그늘지기 쉬워 꽃을 심을만한 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옛 사람들은 뜰에 나무나 꽃을 심어 가꾸면 그것들이 지기(地氣)를 빨아내어 사람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화단이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전통적인 화단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 경주시 교동 최식(崔植)의 집이나 경상북도 달성군 묘리의 박황(朴愰)의 집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볼 때, 화단은 일반적으로 사랑채나 별당의 뜰에 꾸미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뜰 한가운데 양지바른 자리에 네모나게 장대석을 40㎝ 안팎의 높이로 쌓아올려 그 속에 흙을 채워 화단으로 삼았다. 그 넓이는 뜰의 넓고 좁음에 따라 알맞은 크기로 정해졌으며, 그 주위에는 주3주4을 앉혀 화단의 운치를 돋우었다. 또한, 때로는 꽃을 즐기는 자리로서 석탑(石榻)을 놓기도 하였다.

화단에는 주5이나 작약 · 패랭이꽃 · 봉선화 · 맨드라미 · 주6 · 옥잠화 · 원추리 · 상사화 · 참나리 등 갖가지 화초류가 가꾸어졌으며, 그밖에 모란과 석류나무 · 무궁화 · 진달래 · 철쭉 따위의 키 작은 관목류도 곁들여졌다.

모란은 꽃이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일명 화왕(花王)이라고도 하며, 부귀영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흔히 심어졌다. 또한, 석류나무는 한 열매 속에 많은 씨를 가지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유교를 신봉하였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석류나무처럼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나무를 화단에 심어 가꾸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양화소록(養花小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조경사(造景史)』(윤국병, 일조각, 1978)
「고려시대의 정원용어(庭苑用語)에 관한 연구」(윤국병, 『한국정원학회지』 1-1, 1982)
주석
주1

임금이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 우리말샘

주2

고려ㆍ조선 시대에,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풍년이 들기를 빌던 제단. 서울 동대문 밖에 있었다. 우리말샘

주3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연꽃 모양의 돌확. 법주사의 석련지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4

괴상하게 생긴 돌. 우리말샘

주5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줄기는 높이가 30~6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깃 모양으로 갈라진다. 10~11월에 노란 두상화가 가지 끝에 모여 핀다. 어린잎은 식용하고 꽃은 약용하거나 말려서 술에 넣는다. 길가나 산기슭에서 자라는데 한국,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말샘

주6

비름과의 한해살이풀. 높이는 80~10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마름모 모양의 달걀 모양 또는 피침 모양이며, 붉은색 또는 누런색의 무늬가 있다. 여러 개가 서로 접근하여 붙는다. 8~9월에 엷은 녹색 또는 연한 붉은색 꽃이 잎겨드랑이에 피고 열매는 개과(蓋果)이다. 정원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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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윤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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