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찬여사 ()

고려시대사
문헌
조선 후기, 학자 홍여하(洪汝河)가 고려시대에 관해 기전체로 저술한 역사서.
이칭
이칭
목재가숙휘찬여사(木齋家塾彙纂麗史), 휘찬고려사(彙纂高麗史)
문헌/고서
편찬 시기
1639년(인조 17)
간행 시기
1774년(영조 50)
저자
홍여하(洪汝河)
권책수
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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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휘찬여사』는 조선 후기 학자 홍여하(洪汝河)가 고려시대에 관해 기전체로 저술한 역사서이다. 홍여하는 영남 남인 출신으로 효종~숙종 초까지 관료로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전 47권 기전체로 서술된 이 책은 『고려사』를 토대로 『동사찬요(東史簒要)』,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을 활용하여 저술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던 17세기의 사대 정신과 보다 엄격해진 성리학적 역사 인식을 잘 보여 준다.

정의
조선 후기, 학자 홍여하(洪汝河)가 고려시대에 관해 기전체로 저술한 역사서.
서지 사항

'목재가숙휘찬여사(木齋家塾彙纂麗史)'라고도 한다. 전 4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 및 편자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영남 남인(南人) 출신이다. 어려서 부친 홍호(洪鎬)의 스승 정경세(鄭經世)로부터 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큰 유학자로 성장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1654년(효종 5)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정언(正言)과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다. 숙종(肅宗) 즉위 초 2차 예송(禮訟)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병조좌랑(兵曹佐郎)과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1656년(효종 7) 북벌(北伐)을 추진하는 효종(孝宗)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으며, 1659년(효종 10) 효종의 구언교서(求言敎書)에 따라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북방 지역의 방어책과 안민책(安民策), 그리고 붕당(朋黨)의 폐해를 논하였다. 이 때문에 좌천되고 유배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구성과 내용

『휘찬여사(彙纂麗史)』는 『고려사』를 토대로 하되, 『동사찬요(東史簒要)』,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을 활용하여 저술되었다. 권 16은 세가(世家)로서, 고려 태조(太祖)에서 공양왕(恭讓王)까지 32명의 역대 왕들의 행적을 적고 있다. 우왕(禑王)창왕(昌王)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 것은 『고려사(高麗史)』와 같다. 이 내용을 『고려사』에서는 「반역전(叛逆傳)」에 수록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책에서는 「신서인전(辛庶人傳)」을 따로 설정 · 수록하고 있다. 권 719는 지(志)로, 「천문지(天文志)」 · 「오행지(五行志)」 · 「지리지(地理志)」 · 「예지(禮志)」 · 「악지(樂志)」 · 「여복지(輿服志)」 · 「선거지(選擧志)」 · 「백관지(百官志)」 · 「식화지(食貨志)」 · 「병지(兵志)」 · 「형법지(刑法志)」 등 11개 분야로 되어 있다. 권 20~46은 열전(列傳)으로, 「왕후(王后) · 제원비전(諸院妃傳)」 · 「종실전(宗室傳)」 · 「신서인전」 · 「명신전(名臣傳)」 · 「의열전(義烈傳)」 · 「유학전(儒學傳)」 · 「탁행전(卓行傳)」 · 「행인전(行人傳)」 · 「양리전(良吏傳)」 · 「문원전(文苑傳)」 · 「방기전(方技傳)」 · 「환자전(宦者傳)」 · 「혹리전(酷吏傳)」 · 「폐행전(嬖幸傳)」 · 「간신전(姦臣傳)」 · 「반역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권 47은 「외이부록(外夷附錄)」으로, 「거란전(契丹傳)」 · 「여진전(女眞傳)」 · 「일본전(日本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휘찬여사』의 현실 인식과 역사 인식은 열전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홍여하는 고려 말 절의(節義)를 지킨 인물을 현창하였다. 이색(李穡) · 정몽주(鄭夢周) · 이숭인(李崇仁) · 김진양(金震陽) 등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인물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 · 윤소종(尹紹宗) 등 조선 왕조 개창에 공을 세운 인물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조민수(曺敏修) · 변안열(邊安烈) · 왕안덕(王安德) 등 『고려사』에서 간신(姦臣)으로 평가한 인물들을 「명신전」에 넣었다. 이는 17세기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조선 사회의 현실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숭명반청(崇明反淸)과 복수설치(復讎雪恥)라는 시대정신에 따라 명(明) 황실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고 청(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홍여하는 서인(西人)에 의해 추진되는 북벌에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문(鄭文) · 유응규(庾應圭) · 김제안(金齊顏) · 박의중(朴宜中) 등 중국에 사행(使行)을 다녀오면서 외교적 성과를 올린 이들을 「행인전」에 수록하였다. 이는 무력이 아닌 평화적이면서도 외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휘찬여사』는 「외이열전(外夷列傳)」을 수록하였는데, 이는 『고려사』에서는 볼 수 없는 체제이다. 범례에서 밝히기를, 중국의 역대의 사서에는 모두 「외이부록」이 있으므로 그것에 의거해 「거란전」 · 「일본전」 등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휘찬여사』의 구성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입장에 따라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 조선을 중심에 두고 주변을 인식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의 소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휘찬여사』는 조선 초기 『고려사』와 비교하여 성리학적 포폄(褒貶)이 강화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홍여하는 왕권을 강조하여 남인의 정치 운영론을 적용하였으며, 왕이 신하를 함부로 죽인 것을 비판하고 신하의 간쟁(諫爭)을 중요하게 기술하였다. 또한 삼년상 등 성리학적 가족 윤리를 강조하고 불교 등 음사(淫祀)를 배척하려는 인물에 대해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고려사』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한 성리학적 포폄을 확립하고자 하는 그의 입장을 잘 보여주며, 조선 초기에 비해 강화된 17세기 성리학적 윤리 의식을 잘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홍여하는 이전 시기에 비해 철저해진 성리학적 역사관과 윤리 의식을 통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서인에 의해 추진되는 북벌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왕권 중심의 국가 재조론(國家再造論)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고려시대를 중심에 두고 유계(兪棨)『여사제강(麗史提綱)』과 비교해 봄으로써 17세기 서인과 남인의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기전체(紀傳體)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역사서와 차별성을 갖는다. 또한 이 책 이후 본격적으로 강목체(綱目體) 역사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홍여하도 1672년(현종 13)에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을 지었으며, 이는 다시 안정복(安鼎福)『동사강목(東史綱目)』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 경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휘찬여사(彙纂麗史)』

논문

고영진, 「홍여하」(『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 창작과 비평사, 1994)
김보정, 「인조~현종대 정몽주 인식」(『포은학연구』 24, 포은학회, 2019)
도현철, 「목재 홍여하의 역사서 편찬과 고려사인식」(『한국사상사학』 43, 한국사상사학회, 2013)
박인호, 「『동국통감제강』에 나타난 홍여하의 역사인식」(『퇴계학과 유교문화』 54,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4)
박인호, 「『휘찬여사』 「열전」에 나타난 홍여하의 역사인식」(『장서각』 31,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우인수, 「목재 홍여하의 현실인식과 대응」(『한국사상사학』 43, 한국사상사학회, 2013)
한영우, 「17세기 중엽 남인 홍여하의 역사서술: 『휘찬여사』와 『동국통감제강』」(『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1989)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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