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하응은 영조의 현손으로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밀려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다가 철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기회로 삼아 둘째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아명)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에 봉해지고 대왕대비의 수렴청정하에서 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10여 년간 정치에 관여하였다.
이 초상화는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大院君之肖像(대원군지초상)’이라는 해서체의 묵서가 단정하게 적혀 있어 초상화의 주인공이 흥선대원군임을 알 수 있지만, 이외에 제작시기나 작가를 알 만한 화기(畵記)나 관지는 없다. 그러나 중국 청대의 관복으로 여겨지는 이국적인 관복차림이어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압송된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는 『한국회화대관』에 사진만 실려 있는데, 원소장자는 오세창(吳世昌)의 제자인 서예가 원충희(元忠喜)로 되어 있다.
화면에는 노구의 대원군이 좌안 8분면으로 몸을 약간 왼쪽으로 튼 채 손에 짙은 자주색 함을 공손히 받들고 있는 전신상으로 묘사되었다. 사진을 통해 본 표구상태도 당시와 동일하다. 몸은 세밀하고 능숙하게 묘사한 안면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소략하고 엉성하게 표현되었다. 인물은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정상적인 신체비례에 맞지 않게 하반신이 매우 짧아 입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의복은 짙은 먹선으로 라인을 잡고 그 내부를 옅은 옥색으로 채색하였다. 겨드랑이 부분과 소매와 옷이 만나는 부분, 의복하단 등에는 먹으로 음영을 표현하였지만 옷주름은 도식적인 먹선만 그어 명암에 의한 입체감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에는 붉은색 술이 달린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챙이 위를 향하고 모자에 부착된 것으로 보이는 파란색 대는 귀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러한 모자의 구조는 중국 청나라 복식과 유사한 것으로 이국적인 관제이다.
흥선대원군 초상화는 현재 동아대학교 소장본을 포함하여 국내에 총 5점이 소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자 미상 「금관조복본」과 서울역사박물관의 이한철과 이창옥의 합작품(1880년), 서울대학교 소장본의 작자 미상 반신상, 망운재 이원기 소장본 등이 있다. 앞의 세 작품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이 중 서울대학교본과 서울역사박물관본은 똑같은 관모에 세부 표현도 매우 유사하여 같은 초본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이 초상화는 깊이 패인 주름과 반백의 수염이 눈에 띄게 강조되었으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얼굴 하관에 살이 빠져 매우 날카로운 인상을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노년상(老年像)으로 주목된다. 또한, 조선말 서양화법이나 명암법 등이 유입된 시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초상화는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을 따른 점이 매우 특이하며, 초상화 연구에 주목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