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도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을 그린 그림이다. 나한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미륵불 출현 전까지 세상의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했다. 불·보살과 중생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불교 존상으로 ‘아라한’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말부터 나한신앙이 성행하면서 나한도가 상당수 제작되었다. 하지만 외침이나 내부적 상황들로 인해 많이 소멸되었다. 현재 고려·조선 시대를 통틀어 40여 세트 정도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나한도는 주로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을 그린 것이다. 나한도는 다른 주제의 불교회화와 달리 도상이 매우 자유로운 편이다.
나한도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을 그린 그림이다. 나한(Arhat)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한 뒤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기까지 56억 7천만 년 동안 이 세상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처로부터 위임받은 제자들이다. 아라한(阿羅漢) 또는 응공(應供)․복전(福田)․무학(無學)․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신통력을 발휘하는 등 그 위력에 있어서는 불․ 보살에 버금가지만 불제자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어, 불․보살과 중생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불교 존상이다. 나한이란 말은 본래 ‘존경받을 만한 분,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를 부른 존칭이었으나,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의 제자 중에 수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말 선종의 전래 이후 본격적으로 나한신앙이 성행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권17 사우(寺宇) 광통보제사조(廣通普濟寺條)에는 923년 양(梁)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오백나한상을 가져와 해주 숭산사에 안치하였으며, 개경의 남쪽에 있던 광통보제사 나한전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었고, 양쪽 회랑에는 오백나한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나한도는 문헌상의 사례까지 포함하면 상당수 제작되었지만 외침이나 내부적 불교 상황들로 인해 많이 소멸되고, 현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40여 세트 정도가 남아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조선후기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여러 폭으로 나누어 그린 십육나한도와 오백나한도의 사례가 있어 이들을 개별 폭으로 본다면 약 130여 폭이 된다. 이 수량은 수량적인 측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지만, 십육나한과 십대제자가 등장하는 200여 점의 석가설법도나 아미타설법도의 여래설법도까지 포함한다면 한국 나한도의 흐름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현존하는 나한도는 주로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을 그린 것으로, 이들의 모습을 그린 나한도는 다른 주제의 불교회화와 달리 특정한 경전에 의거하고 있지 않아 도상이 매우 자유로운 편이다. 또 전대의 작품이 후대의 소의경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아 도상의 전승이 매우 활발한 장르이기도 하다.
나한은 일반적으로 16명, 18명, 500명이 무리를 이루며 신앙화되는데 나한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상은 십육나한이다. 십육나한은 『불설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佛說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일명 『法住記』)에 의하면, 신통력이 대단한 16분들로, 미륵이 이 땅에 도래하는 그날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정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십팔나한은 경전적 근거는 없지만 경전에 등장하는 사대성문(四大聲聞) 중 십육나한에서 빠진 이를 추가하여 구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오백나한은 경전에는 일부 존자에 대한 언급만 있거나 오백나한이라는 문구만 등장하지 구체적인 존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경전적 근거가 없어서인지 현재 중국과 한국에서는 각기 다른 오백나한의 존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중국의 경우 남송대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1805년 은해사 운부암의 영파가 무학대사의 의례집을 참조하여 편찬한 「오백성중청문(五百聖衆請文)」의 명칭을 따르고 있다.
고려시대는 주로 국가 및 집권세력의 발원으로 제작된 나한도가 많은 편이며, 특히 오백나한도의 제작이 성행하였다. 조선후기는 현존하는 한국의 나한도가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시기인 동시에 특히 십육나한도가 성행한 시기이기도 하다. 승려 및 민간, 상궁들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발원하였다. 그림을 통해 명대 화보인 『삼재도회(三才圖會)』의 불조도상(佛祖圖像)이나 책거리 도상이 적극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말기에는 근대로 이행되면서 서양화법과 민화적 요소들이 나한도에 적극 수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