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나한도는 부처의 제자 중 아라한과를 얻은 500명의 나한을 그린 그림이다. 오백나한은 부처의 열반 직후 왕사성의 1차 결집 때 불전(佛典)을 편찬한 제자들이다. 이들을 모신 전각을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또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이라 부르고, 상과 그림을 봉안하여 예배한다.
오백나한의 존명은 경전에 구체적으로 모두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오백나한’이라는 용어만이 쓰여 있거나 오백나한 중 일부 존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통일된 존명이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중국과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존명이 각기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래 오백나한신앙이 유행하면서 오백나한도 및 조각상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 나한신앙은 주로 국가 및 집권세력의 주도로 나한재 및 나한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외침이나 가뭄 등의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나한도가 발원되었다.
그림의 형식으로는 오백나한을 각각 1폭씩 모두 500폭으로 그린 것과 1폭에 500명의 나한을 모두 그린 것이 있다. 오백나한을 각각 1폭에 모두 500폭으로 그린 형식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분산, 소장된 고려시대의 오백나한도가 대표적이다. 대부분 원형 두광을 갖추고 가사 장삼을 입고 측면을 향해 암석 위에 걸터 앉아 있으며, 그 밖에 불제자들이 사용하는 기물이 등장하는 점 등 화면의 구성방식이 유사하다.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오백나한도」(고려 말∼조선초기)는 1폭에 석가삼존(釋迦三尊)을 중심으로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을 모두 표현하였다. 윗부분에는 수묵의 산수가 표현되어 있다. 오백나한의 경우 적게는 2∼3위(位)에서 많게는 수십여 위(位)가 무리를 이룬 모습으로 다양한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와 같이 한 폭에 석가삼존과 오백나한을 그린 그림은 동아시아 불교도상에서는 현존 예를 찾아 볼 수 없으나, 북송대 법능(法能)의 「오백나한도」에 대한 구체적 인식으로 바탕으로 도상이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송대의 회화, 고려시대 수묵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