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 )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정면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정면
건축
유적
국가유산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돈암서원 경내에 있는 조선후기 강당건물. 유교건축.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岩書院 凝道堂)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08년 07월 10일 지정)
소재지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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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은 충청남도 논산시 돈암서원 경내에 있는 조선 후기 강당 건물이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고자 1634년에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이다. 이후 사액서원이 되었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을 면하였다. 돈암서원의 응도당은 1971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본래는 행례의 중심 건물이었으나 이건 후에 강당의 역할을 수행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평면구성이며 절충적 공포 구성과 지붕의 ‘영(榮)’ 등이 남아 있다. 응도당은 강당으로서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건물이다.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돈암서원 경내에 있는 조선후기 강당건물. 유교건축.
개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을 제사지내고 그의 학문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조선 후기 사립교육기관이다. 1634년에 설립되었으며, 165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여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는 돈암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충남지역에서 노강서원과 함께 훼철을 면하였다. 평지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 배치를 하고 있는 돈암서원은 1880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건축적으로 배치 등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응도당은 원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71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역사적 변천

돈암서원은 김장생이 타계한 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에 그의 제자와 지역의 사림들이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돈암(遯巖)’의 액호를 받아 사액서원으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김집(1658)과 송준길(1688), 송시열(1695)을 추배하여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처음 서원은 충청남도 연산군 임리 249번지에 위치하였으나 1880년(고종 17) 침수 피해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건비문(移建碑文)에 따르면 당시 사우, 외사, 내사가 이건 되었으며, 응도당과 비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또한 응도당의 편액은 새롭게 옮겨진 서원의 외사에 걸었고, 응도당에는 양성당의 편액을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돈암서원은 건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응도당은 197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건하면서 본래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지금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쪽에 치우쳐 자리하고 있다. 이건 전 서원에서 응도당의 자리는 사우 전면, 지금의 양성당의 위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행례(行禮)의 중심건물이었으나 이건 후에 강당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용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양 측면 박공 하부에 덧지붕 일종인 ‘영(榮)’이 설치되어 있어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으며 평면 또한 일반적인 강당의 형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응도당은 측면 3칸 중 가장 뒤 쪽으로 좌측 1칸, 1칸 반의 크기로 마루방을 꾸미고, 가장 우측 1칸 역시 마루방으로 구획하고 있다. 방으로 구획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외부로 개방되어있으며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다. 그러나 본래는 중앙의 3칸(堂)을 제외한 좌우 협칸은 벽체로 구분된 방이었으며, 두 방을 각각 ‘거경(居敬)’과 ‘정의(精義)’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같은 응도당의 모습은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경 · 대부 · 사(卿大夫士)의 가옥인 하옥(廈屋)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김장생은 생전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저술하면서 고대 중국의 예서에서 전하는 이상적인 전각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바 있는데 사후에 송준길, 송시열 등 그의 제자들이 응도당을 건립하면서 하옥제도에 입각한 평면과 구조를 채택하였다. 그 특징은 평면구성에서 중당(中堂)과 동서상(東西廂), 중당 뒤에 실(室)과 좌우 방(房)과 동서 협실(夾室)을 두는 것이며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에 양 측면에 덧지붕의 일종인 ‘영(榮)’을 두는 것이다. 현재 응도당은 내부 바닥 일부 및 창호가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평면구성이나 영 등이 잘 남아있다.

특징

응도당은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경 · 대부 · 사(卿大夫士)의 가옥인 하옥(廈屋)의 제도를 본받아 지은 건물이다. 이건과 중수 등의 과정에서 내부 바닥 일부와 창호 등에 변형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평면구성과 ‘영(榮)’ 등이 잘 남아있다. 또한 주심포, 익공, 다포의 절충적 구조를 보여주는 공포의 방식과 지붕의 ‘영(榮)’의 구성은 노강서원 강당과 유사한 형식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응도당은 당초 위치에서 이전되었지만, 1971년 건물을 옮길 때 서원 창건 연대인 1633년의 명문 기와가 다수 발견되어 오래된 건물임을 확인하였다. 강당으로서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크며, 절충적인 공포의 구성은 인근의 노강서원 강당과 같은 수법으로, 장식화되는 후기적 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하옥(廈屋)의 제도를 따른 평면의 구성과 ‘영(榮)’의 설치 등은 17세기 사림들의 예제(禮制)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참고문헌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정밀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1)
『돈암서원지』(돈암서원, 1994)
「17세기 사림의 묘침제 인식과 서원 영건」(정기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집필자
홍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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