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공과 관련된 용어는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1623)에 등장한다. 입공(立工), 초입공(初立工), 이입공(二立工), 엽공(葉工), 이엽공(二葉工), 무리공(無里工), 행공(行工)은 모두 익공의 종류와 구성 요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다양한 표기는 『경모궁개건도감의궤(景慕宮改建都監儀軌)』(1776),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1801)에서 익공(翼工)으로 통일되었다. 발음이 비슷한 용어 중에서 형태상의 한 특징이 강조되면서 익공이라는 표기로 고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재(部材)의 끝이 뾰족해지면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굽은 형태는 새가 날개[翼]를 편 모습을 연상하게 하므로, 다른 용도로 쓰이는 부재라 할지라도 이러한 모양이면 익공으로 통칭하였다. 예를 들어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에서는 인정전 공포의 살미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이 중 제공(齊工)은 살미의 끝이 올라간 것이고, 익공은 살미의 끝이 내려간 것이며, 운공(雲工)은 둥글게 마무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용례는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1904)에서도 발견되는데, 모두 익공을 다포식(多包式) 건축에서 살미의 한 형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으로서 익공은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직교(直交)하여 보를 받치는 짧은 부재를 가리킨다. 끝 모양을 둥글게 하여 초각한 한 경우에는 물익공(勿翼工)이라 부르고, 사용된 익공의 개수에 따라 초익공, 이익공, 삼익공으로 나누며, 출목(出目) 익공을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익공 양식이 기둥머리에 끼워 보를 받쳐주는 보강 부재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한다면 그 기원은 매우 이른 시기로 소급된다. 그러나 익공이 가진 장식성을 포함하여 남아있는 유물을 검토해 보면 고려시대 건축물의 헛첨차(헛檐遮)와 연관지을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는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끼워 주두를 감싸는 모양으로 공포의 하부를 보강한다. 헛첨차는 외부에서는 공포의 일부가 되고 내부에서는 보를 받치는 보아지로 작용하는데, 이와 유사한 구조를 아산맹씨 행단에서 볼 수 있다. 아산맹씨 행단의 주두 아래에는 서로 직교하는 첨차가 끼워져 있어 공포의 의장성과 헛첨차의 기능성을 간단하게 확보하였다. 그러므로 아산맹씨 행단의 목조를 익공식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의견이 있다. 16세기 건축인 강릉 오죽헌과 강릉 해운정에서는 익공이 형식화되는 과정이 보이며, 양동마을의 여러 주택에서는 전형화된 익공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소수서원의 일신재와 직방재와 같이 익공의 끝을 직각으로 잘라 장식성을 배제하고 구조적 기능만 취한 사례도 발견된다. 임진왜란 이후 종묘 등 국가의 주요 시설을 재건할 때 익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익공은 중요한 건축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익공의 기초적인 형식은 초익공(初翼工) 방식이다. 이는 기둥 위 사개에 익공을 끼운 후, 좌우에 창방을 결구(結構)하고, 주두와 소로를 얹어 장여와 보를 받친 다음, 도리를 올리는 방식이다. 이익공(二翼工) 방식은 초익공 방식보다 건물의 높이를 올리고 장식을 증대시키기 위해 익공을 두 번 반복한 형식이다. 초익공과 주두 위에 이익공과 행공(行工)을 십자로 맞춘 후 재주두를 두고 장여와 보를 올리게 된다. 이때 창방과 장여 사이에 이익공의 높이만큼 틈이 생기므로 중간을 화반으로 받치는 경우도 있다. 익공의 형식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출목이 발생한다. 출목익공(出目翼工)은 기존의 공포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구별하기 쉽지 않아서 주삼포(柱三包) 등 별도의 형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법주사 팔상전이나 밀양 영남루의 목조는 학자에 따라 익공식과 포식(包式)으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익공 양식은 조선시대에 다른 공포 양식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달했다. 종묘 정전이나 사직단 정문에 보이는 삼분두 모양의 보머리, 여수 흥국사 법왕문이나 성남봉국사 대광명전 등의 살미는 다포식 의장의 영향을 받아 익공이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다포식 공포에 운공과 촛가지가 발달하고 제공들이 일체화되어 넝쿨이나 연꽃 등 식물 문양이 공포를 감싸는 경향은 익공 양식이 전파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다포식 건축에서 주두 아래 안초공(桉草工)이 점차 발달하여 주두와 평방을 감싼 후 공포와 결합하는 양상은 익공 양식의 구조적 장점이 다포식에 영향을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익공은 한국 건축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한국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익공의 장식적 형태는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찰에서 사용한 익공은 보다 화려한 형태로 쇠서[牛舌] 위에 연화나 연봉을 추가하고 측면에 당초문과 같은 문양을 넣었으며, 실내 보아지 부분도 복잡하게 장식하였다. 반면, 궁궐이나 관청에서 사용한 익공은 비교적 정형화된 형태를 유지하였다. 궁궐 익공의 형태는 부재 윗면이 거의 수평으로 뻗다가 끝을 살짝 아래로 구부린 날개 모양이 대부분이다. 입공, 엽공 등의 유사 용어가 궁궐 관련 기록에서 익공으로 통합된 것은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경기 지역의 봉은사나 흥국사와 같은 사찰에서는 궁궐과 유사한 익공 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왕실의 지원을 받는 능침사찰(陵寢寺刹)임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익공식 건축은 기본적인 축부재만으로 건축되는 민도리집과 화려한 공포를 갖춘 포집 사이에서 구조적 효율성을 강화하고 장식적 가능성을 모색한 한국 건축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평가된다. 개념적으로 민도리집이 창방, 주두, 장여를 갖추는 과정에서 익공이 발생하며, 반대로 포집이 기둥의 상부 구조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익공의 역할이 드러난다. 익공은 기둥에 끼우는 부재이기 때문에 주변 부재의 뒤틀림과 이탈을 방지하며, 주두를 감싸면서 기둥 상부를 일체화한다. 또한 필요한 부재의 수가 적으면서도 장식에서 단정함과 화려함의 정도를 쉽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건축 유형에 두루 사용할 수 있었다. 익공이 발전하면서 조선 후기 한국 건축은 포식, 익공식, 민도리형식으로 목구조의 체계가 계열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