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은 원나라의 선종 승려인 몽산 덕이(蒙山德異, 1231~?)가 『화엄경』을 간송(看誦)하는 무차대회를 개최하면서 행한 설법(說法)을 조선 전기에 간행한 불교서이다. 덕이는 1281년 10월부터 1289년 10월 사이에 여러 승려들과 함께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며 1백여 차례 『화엄경』을 간송하였는데, 이 보설은 그 당시 덕이가 한 차례의 『화엄경』 간송을 마치고 무차대회를 열면서 설한 내용이다.
원 간섭기 초기인 1290년대에 고려의 승려와 고위 관료들은 중국 항주의 휴휴암에 머물고 있던 덕이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덕이의 저술과 사상은 고려에 전해져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1300년(충렬왕 26)에는 덕이가 편찬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간행되었고, 1357년에는 덕이의 법어(法語) 일부를 모은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이 필사되기도 하였다. 또 1304년(충렬왕 30)에는 덕이의 제자인 철산 소경(鐵山紹瓊)이 고려에 찾아와 3년 동안 머물며 고려 불교계와 교류하고 왕실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이 책도 당시에 전해진 덕이의 저술 중 하나로 생각되지만 책이 전래된 구체적인 정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몽산화상육도보설』은 지금까지 목판본으로 28회 간행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중 고려시대에 간행된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에 소장된 절첩장본은 14세기 말~1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판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판본이지만 책에는 간기가 없다. 이 책의 뒷 부분에는 덕이의 행적을 서술한 「덕이연기(德異緣起)」가 붙어 있다.
간기가 있는 판본 중에는 1432년(세종 14)에 간행된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판본이다. 그러나 간기의 뒷부분이 마멸(磨滅)되어 간행지를 확인할 수 없다. 이후 15세기 후반에 5회, 16세기에 21회 간행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1640년(인조 18)에 천관사(天冠寺)에서 단 1회 간행된 것이 확인되었다.
1567년(명종 22) 전북특별자치도 순창 취암사(鷲岩寺)에서 간행된 판본은 유일한 언해본(諺解本)으로 한문으로 된 원문 뒤에 언해가 수록되어 있다.
『몽산화상육도보설』의 서두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입장으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범부(凡夫) 중생들이 윤회하는 지옥 · 아귀 ·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 인간 · 천상 등의 육도와 성문 · 연각 · 보살 · 부처의 사성도(四聖道) 등 십법계(十法界)(十法界)에 대해 설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후 육도의 중생들이 자신의 마음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고통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경전과 선어록에 나오는 '깨달음을 곧바로 얻은 일화'들을 소개하면서 깨달음을 단박에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들은 이 설법을 들은 인연으로 서방 극락(西方極樂) 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
『몽산화상육도보설』은 조선 전기에 가장 많이 간행된 불서 중 하나로 전국 여러 지방의 사찰에서 고르게 간행되었다. 고려 말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과 조선 초기의 득통 기화(得通己和, 13761433)가 쓴 「육도보설」이 죽은 사람을 위한 천도재(薦度齋)에서 설해진 것을 고려할 때, 덕이의 『몽산화상육도보설』도 천도재와 같이 죽은 사람을 위한 법회 등에서 널리 읽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고려 말 이후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몽산 덕이의 사상이 우리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또한 당시 불교인들의 윤회 및 깨달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