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를 들고 있는 석가모니불 입상을 거대한 화폭에 도해하였다. 통상 연꽃 가지를 지물로 들며 여의를 지물로 든 예는 드물다. 독존 형식의 석가모니괘불도로 보이나 두광의 좌우측에는 두 여래,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두 협시보살을 작게 배치하였다. 길이가 긴 화면의 비율로 인해서인지 본존의 신체가 두부에 비해 하반신이 매우 길게 표현되었다.
본존은 육계가 뾰족하고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를 나타냈으며 안면의 묘사와 채색법, 오색의 신광, 배경의 채운 등에서 18세기부터 유행한 독존도 형식의 괘불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27년의 미황사 괘불도, 1753년의 선암사 괘불도 등에서처럼 제 권속을 위계를 구분해 작게 나타내 독존도 형식의 괘불도를 계승하였다.
불화는 봉인(奉仁)을 수화승으로 송수(松壽), 규재(奎宰), 법영(法榮) 등 총 4명의 화승이 제작하였다. 봉인은 1910년 만총(萬聰)과 전북특별자치도 남원 선원사(禪院寺)의 비로자나후불도, 명부전 지장도, 대웅전 신중도를 그렸으며 1940년대까지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봉인의 양식적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불화이다. 당시 불사는 근대기 불교 교단의 대표적인 학승이자 광복 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제1대 교정을 맡았던 정호(鼎鎬)가 증명(證明)을 맡았다.
세로 791.1㎝, 가로 337.5㎝의 비단 바탕에 그려진 괘불도이다. 석가모니불의 신체에서 발하는 빛은 녹색의 원형 두광과 오색 신광으로 표현되었다. 등장 인물은 칠존도의 구성을 이루지만 위계를 현격하게 다르게 나타내어 석가모니독존도의 인상이다. 조선 후기 괘불도에서는 보관을 쓰고 신체를 장엄한 보살형의 석가모니불이 유행하였다. 법화신앙에 기반한 불신관(佛身觀)에 기반해 석가모니불을 장엄신(莊嚴身)으로 도해한 것으로, 이는 전각 내부에서는 선호되지 않던 도상이다.
「천황사 괘불도」의 주존은 여래의 모습이나 손에는 일반적으로 보살이 지물로 드는 여의를 들고 있으며, 가슴을 가로지르는 군의 중앙에 표현한 꽃 장식, 다리 사이로 늘어 뜨러진 영락과 매듭이 표현되었다. 1704년 조성된 수도사 괘불도처럼 장엄신을 도해한 괘불과 유사한 초본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통 괘불도의 요소를 계승하여 배경에 산화하는 꽃을 구름으로 바꿨으나 밑그림, 구성, 세부 모티브, 육신부의 채색, 오색 서기 등에서 전통 방식을 계승한 근대기의 대표적인 괘불도이다.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괘불도 도상과 구성을 계승하면서 장엄신의 석가모니불을 여래형으로 나타냈다. 밑그림, 표현 기법, 세부 모티브에서 전통 불화의 요소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화면 상부의 다소 번잡해진 서기(瑞氣)의 표현, 전면에 시문된 군청색 등의 새로운 안료는 근대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봉인은 1910년부터 1940년대까지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으로, 봉인이 그린 괘불도로 근대기 불화승의 양식적 특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2014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