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악장은 조선조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제례악에 올려 부른 한시 형태의 노랫말이다. 1463년(세조 9)에 만든 종묘 악장은 총 26편으로, 영신(迎神) 희문(熙文) ~송신(送神) 흥안(興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속악도 정비해야 한다는 박연의 건의에 따라 세종은 정대업, 보태평, 발상, 취풍형, 치화평, 여민락 등을 지었다. 회례악으로 제작된 보태평과 정대업은 1463년 종묘악으로 개작되었다. 종묘악장은 1464년 종묘제향에서 연주한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1463년(세조 9) 12월에 만든 종묘 악장은 ‘영신(迎神) 희문(熙文)/전폐(奠幣) 희문(熙文)/진찬(進饌) 풍안(豐安)/초헌(初獻)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 희문(熙文) · 기명(基命) · 귀인(歸仁) · 형가(亨嘉) · 집녕(輯寧) · 융화(融化) · 현미(顯微) · 용광(龍光) · 정명(貞明) · 대유(大猷) · 역성(繹成)/아헌(亞獻) · 종헌(終獻)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소무(昭武) · 독경(篤慶) · 탁정(濯征) · 선위(宣威) · 신정(神定) · 분웅(奮雄) · 순응(順應) · 총유(寵綏) · 정세(靖世) · 혁정(赫整) · 영관(永觀)/철변두(徹籩豆)/송신(送神) 흥안(興安)’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신 · 전폐 · 진찬에 각 1편씩의 악장이, 초헌( 보태평)에 11편의 악장이, 아헌 · 종헌( 정대업)에 11편의 악장이, 철변두 · 송신에 1편씩의 악장이 각각 배치됨으로써 종묘 악장의 수는 총 26편이 된다.
아악에 이어 우리의 속악 또한 정비해야 한다는 박연(朴堧)의 건의에 따라 세종은 국조 고취악(鼓吹樂)을 바탕으로 정대업 · 보태평 · 발상 · 취풍형 · 치화평 · 여민락 등을 지었는데, 그것들을 신악(新樂)이라 부르고 종묘제향에 쓰도록 한 인물이 세조였다. 그러나 분량이 많아 제사 지내는 동안 다 연주할 수 없다는 이유로 1463년(세조 9) 12월에 개편하여 1464년 정월의 종묘 친사 때 연주한 이후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악으로 정착되었다. “임금이 세종이 지은 정대업 · 보태평 악무의 가사 자구 숫자가 많아서 모든 제사를 지내는 몇 시각 사이에 다 연주하기가 어려워 그 뜻만 따라 간략하게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세조가 몸소 악장까지 지은 것으로 이해되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고취악과 향악(鄕樂)을 바탕으로 창작된 세종 때의 보태평과 정대업은 당시에 회례연(會禮宴)의 음악으로 사용되었으나, 세조 때 이것을 종묘제례악으로 개작함으로써 ‘제사음악을 향악으로 하거나 적어도 향악을 섞어 써야 한다’는 세종의 유의(遺意)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아악 일변도의 기존 제사음악에 쓰이던 아악 악장 대신 새롭게 만들어진 가사들을 썼는데, 그 중심 내용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선조들의 문덕과 무공이다. 보태평 11수, 정대업 11수 등 종묘 악장의 각 소제목들은 내용 중의 핵심 어구를 뽑아 만든 것들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태평 악장들의 경우, 〈영신 희문〉은 ‘세덕(世德)으로 후손을 열어주신 열성께 공경히 제사를 올림’을, 〈전폐 희문〉은 ‘제물을 올려 선조께서 흠향하시려 하니 예의의 마음이 일어남’을, 〈풍안〉은 ‘조두(俎豆)와 음악으로 향기로운 효사(孝祀)를 올림’을, 〈초헌 희문〉은 ‘열성께서 희운을 여시니 문치가 창성함’을, 〈기명〉은 ‘목조가 경원에서 크게 문을 열어 나라의 긴 천명을 터 잡았음’을, 〈귀인〉은 ‘덕원에서 어진 이를 따라 큰 터를 열었음’을, 〈형가〉는 ‘익조와 도조가 임금에게 공경히 복종하니 크게 형통하여 아름답고 큰 천명이 따라붙음’을, 〈집녕〉은 ‘환조가 쌍성에서 은총의 명을 받아 큰 복록을 이루게 되었음’을, 〈융화〉는 ‘태조의 신기한 덕화로 도이(島夷)와 산융(山戎)이 모두 좇아와 충성을 바침’을, 〈현미〉는 ‘태종의 구가(謳歌)와 여망이 높되 돈독한 사양의 미덕을 나타냄’을, 〈용광〉은 ‘태종이 천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용광이 빛남’을, 〈정명〉은 ‘태종을 도와 정도전의 난을 평정한 원경왕후의 곧고 밝으심’을, 〈대유〉는 ‘조종 대대로 문덕을 펴서 제작이 밝게 갖추어져 빛남’을, 〈역성〉은 ‘열성조의 덕으로 교화가 이루어지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음’을 각각 노래하였다.
정대업의 경우, 〈소무〉는 ‘열성의 거룩한 무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노래함’을, 〈독경〉은 ‘목조께서 알동에서 오천호소의 우두머리로 있었는데, 왕업이 이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탁정〉은 ‘거룩한 환조께서 완악한 토호들을 물리치고 쌍성에서 나라의 강토를 개척했음’을, 〈선위〉는 ‘태조께서 무공을 세워 천위를 펴심이 빛나고 당당했음’을, 〈신정〉은 ‘하늘이 태조를 도와 귀신같은 무공으로 나라를 안정시켰음’을, 〈분웅〉은 ‘태조의 무공으로 외적들을 물리쳐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 없게 된 것은 나라의 복임’을, 〈순응〉은 ‘위화도 회군은 천인(天人)의 협찬임’을, 〈총유〉는 ‘회군하여 더러운 덕을 깨끗이 씻으니 동해가 영원히 맑아졌음’을, 〈정세〉는 ‘태종께서 음모를 꾸미는 정몽주를 베어 세상이 안정되었음’을, 〈혁정〉은 ‘대마도의 왜구들을 쳐부수고 나라를 안정시켰음’을, 〈영관〉은 ‘열성의 거룩한 무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노래함’을 각각 언급하였다.
종묘에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 있는데, 정전의 경우 19실에 19위의 왕들과 30위 왕후들의 위패를 모셨고, 영녕전에는 정전으로부터 조천(祧遷)된 15위의 왕들과 17위의 왕후들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위패를 16실에 모셨다.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종묘제례는 길례(吉禮)의 대사(大祀)로서 조선왕조의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얻고자 행하던 국가제의였다. 악대가 연주하는 기악(器樂)(정대업 · 보태평), 노래로 부르는 악장(종묘 악장), 문무(文舞) · 무무(武舞)로 이루어지는 의식 무용으로서의 일무(佾舞) 등이 종합된 예술체가 종묘제례악이다. 원래 세종대 회례악으로 제작된 보태평과 정대업은 1463년 종묘악으로 개작되었고, 1464년 종묘제향에서 연주한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조선조의 종묘악은 이전의 제례악들과 달리 속악으로 만들어졌으며, 악장 또한 다른 제례들의 아악 악장들과 달리 제사 대상인 열성들의 실제 사적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제사음악에 우리 고유의 음악을 써야 한다는 세종의 뜻이 반영된 일이기도 했지만, 아악 악장들이 추구하던 중세의 보편 정신을 탈피하여 우리 나름의 독자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