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은 조선전기 집현전교리, 보문각제조,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한 음악인이자 음악이론가이다. 1378년(우왕 4)에 태어나 1458년(세조 4)에 사망했다. 악리에 밝아 세종을 도와 음악을 정비하는 데 공이 컸고,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해 올린 수십 회의 상소문이 그의 시문집 『난계유고』에 실려 있다. 막내아들 계우가 박팽년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으나 세 임금에 걸쳐서 봉직한 공으로 연좌의 화를 면했다.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태어나 81세로 고향의 고당리(高塘里)에서 죽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을 시조로 하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서, 중시조는 고려조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던 언인(彦仁)이고, 할아버지 시용(時庸)은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이었으며, 아버지 천석(天錫)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김오(金珸)의 딸이었으며, 부인은 정경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판서를 지낸 송빈(宋贇)의 딸이었다.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맹우(孟愚)는 현령을 지냈고, 둘째아들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막내아들 계우(季愚)는 박팽년 등 사육신들의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막내아들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박연도 화를 입을 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걸쳐서 봉직한 공으로 연좌의 화를 면했다. 1405년(태종 5)에 생원, 1411년 진사에 등과했으며 그 뒤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奉常判官兼樂學別坐) · 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 · 공조참의(工曹參議) · 중추원사(中樞院使) · 보문각제조(寶文閣提調) ·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위로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아래로는 박연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었으며, 더욱이 해주(海州)에서는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는 경돌이 나는 등 시운(時運)이 들어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박연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 상황과도 적지않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순(舜)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夔)에 비견되기도 하는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律管)을 제작하기 위하여 수삼 차에 걸쳐서 시험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 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請制律管疏’을 위시해서 제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글‘請正祀享雅樂疏’, 축의 제도를 개정하자는 주장 ‘請改正柷制疏’, 악현의 제도를 옛 법대로 고치자는 주장 ‘請樂懸復古制疏’, 그리고 악보를 간행하자는 상소문 ‘請印行樂譜疏’에 이르기까지 무려 39편의 상소문이 『난계유고(蘭溪遺藁)』에 실려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