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世宗)은 즉위 후 역산(曆算) 연구 사업을 시작하였다. 역산 연구의 중심이 되었던 관청은 산법교정소(算法校正所)와 역산소(曆算所)이다. 조선의 역산 수준이 높지 않음을 아쉽게 여긴 세종이 『대명력(大明曆)』 등의 역법서(曆法書)와 『계몽산(啓蒙算)』 등의 산학서(算學書)를 구하였으나 서운관(書雲觀), 습산국(習算局), 산학중감(算學重監) 등 기존에 설치된 산학, 역법 관련 관청에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에 산법교정소를 별도로 설치하고 문신(文臣) 3·4인과 산학인(算學人)을 두어 산법(算法)을 익히고 역법을 추보(追補)하도록 하였다.
세종의 명에 따라 산법교정소를 중심으로 역산 연구 사업이 시행되어 산학서와 역법서에 대한 학습과 교정이 이루어졌다. 산법교정소의 사업에 참여하였던 문신으로는 정흠지(鄭欽之),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 유순도(庾順道) 등이 있었다. 1432년(세종 14)에 세종은 이들이 『수시력(授時曆)』을 완벽하게 익혔음을 확인하고는 연구 성과를 책으로 편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444년(세종 26)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등의 역산서(曆算書)가 완성되었다.
산법교정소는 세종 초에 설치되었으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다. 역산 연구가 시작된 1420년(세종 2)에 설치되었다는 견해와 1423년(세종 5)에 문신 관료가 역산 연구에 투입되며 설치되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1437년(세종 19)에 역산소를 설치하여 훈도(訓導) 3인과 학관(學官) 10인을 두고 산학서와 역법서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후 산법교정소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산법교정소의 기능이 역산소로 이관되고 산법교정소는 오래지 않아 없어졌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