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金)나라는 개국 초기인 1125년(인종 3) 요(遼, 9161125)를 멸하고 요의 역법(曆法)이었던 가준(賈俊)의 『대명력(大明曆)』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27년(인종 5) 정강(靖康)의 변(變) 때에 북송(北宋, 9601127)의 수도를 공략하여, 그곳에 있던 역서와 천문의기(天文儀器)들을 모두 몰수하여 가져간 후 북송에서 얻은 『기원력(紀元曆)』을 바탕으로 금의 역법을 정비하였다. 이 역법이 바로 양급(楊級)에 의해 편찬된 『대명력』인데 후에 이 역법을 다시 보수하여 만든 역법이 『금사(金史)』에 전하는 조지미(趙知微)의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이다. 양급의 『대명력』은 1137년(인종 15)부터 조지미의 『중수대명력』이 시행되기 전인 1181년(명종 11)까지 사용되었다. 『중수대명력』의 서문(序文)에 의하면 양급의 『대명력』은 북송의 『기원력』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기술되어 있고, 『원사(元史)』 「유병충전(劉秉忠傳)」과 「역지(曆志)」에는 양급과 조지미의 『대명력』은 요나라 가준의 역법에서 나왔으며, 양급의 『대명력』은 천문을 새로 관측하지 않은 채 『기원력』을 약간 손을 본 정도라고 전한다. 그러므로 금의 『중수대명력』은 요나라 가준의 『대명력』과 북송의 『기원력』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몽골은 금나라 연경(燕京: 현, 북경)을 정복한 1215년(고종 2)부터 『중수대명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 역법은 몽골 제국 내의 모든 울루스(Ulus) 국가의 지배 계층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원(元, 12601368)에서는 1281년 『수시력(授時曆)』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중수대명력』은 원나라의 『경오원력(庚午元曆)』과 『수시력』 뿐만 아니라, 일한국(Ilkhanid, 12561335)에서 제작된 『키타이력(Kitai calendar)』의 편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조선(朝鮮)으로 전해진 『중수대명력』은 세종(世宗) 때 천문학자(天文學者)인 이순지(李純之, 14061465)와 김담(金淡, 14161464)의 연구 교정을 거쳐 1444년(세종 26)에 갑인자(甲寅字)로 재간행되다. 이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과 더불어 일식(日蝕) · 월식(月蝕) 계산의 삼편법(三篇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654년(효종 5) 『시헌력(時憲曆)』이 시행된 이후로는 사편법(四篇法)에 편입되어 19세기까지 일 · 월식 계산에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