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산업 (신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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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기, 고무신 제조로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경공업이자 경제개발기 한국 대표 수출 산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발 산업은 일제 시기 고무신 제조로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경공업이자 경제개발기 한국 대표 수출 산업이다. 일제 시기부터 많은 공장들이 가동하였고, 해방 후에도 가장 성장이 뚜렷한 산업이었다. 1960년대 수출 시장이 열리면서 보다 도약했으며, 그 정점이었던 1970~80년대 신발은 대표 수출품이었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저임금과 OEM 주문 생산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빠르게 사양산업화하였다. 이후 제조 기지 해외 이전, 기술 혁신을 통한 제품 차별화, 독자 브랜드 개발 등을 통해 재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목차
정의
일제 시기, 고무신 제조로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경공업이자 경제개발기 한국 대표 수출 산업.
내용

신발 산업은 경공업 분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산업이다. 국내에도 일제 초기에 이미 고무신을 제조하는 공장들이 설립되었고, 일본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참여하였다. 이런 현상은 상대적으로 기술집약도가 낮고 노동집약도는 높으며 소자본으로도 설립이 가능한 산업적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고무신 제조는 롤러 등의 상대적으로 간단한 설비와 고무 배합 기술자만 확보하면 생산이 가능했다. 따라서 일제 시기에 이미 매우 많은 신발 공장들이 있었다. 서울과 평양, 부산이 중심지였으며, 상대적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신발 공장의 규모가 컸지만, 한국인 경영 공장도 제법 큰 규모의 공장들이 있었다. 일본인 공장으로는 삼화(三和)고무, 아사히(朝日)고무, 한국인 공장으로는 천일(天一)고무, 중앙상공(中央商工) 등이 대표적이다.

해방 후에도 신발 산업은 가장 각광 받는 유망한 업종이었다. 일제 시기부터 있었던 공장들에 더하여 중소규모의 신생 공장들도 활발하게 설립되었다. 해방 당시 33개였던 신발 공장은 1947년 84개, 1948년 150개, 1949년 269개로 급증하였다. 이런 현상은 신발 산업의 산업적 특성 상 진입 장벽이 낮고, 또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신발을 포함한 생필품 부족이 장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전시통제에 억눌렸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80년대 세계적인 신발 제조업체로 성장한 국제상사도 이때 국제고무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일본인 신발 공장들은 귀속기업체가 되어 미군정의 관리를 받은 후, 한국 정부에 이관되어 민간에 불하되었다. 2,900만 켤레가 생산된 1949년부터는 공급 과잉 현상까지 나타났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신발 산업의 지형을 변화시켰다. 부산 지역이 신발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일제 시기부터 신발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라는 점에 더하여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과 주원료 생고무 등이 원조를 통해 부산항으로 들어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군화 등을 만드는 군수 시장의 확대 혜택도 부산 지역 신발 공장들이 사실상 독점하였다. 휴전 후 타 지역 신발 공장들의 가동도 본격화되면서 생산 과잉이 다시 도래하였다. 1954년 연간 신발 생산은 4,600만 켤레를 넘어서고 있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 시작되었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이미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부산 지역 신발 공장들이 보다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959년 전국에서 종업원 200명 이상을 계속 고용하고 있는 신발 업체는 경성고무, 국제고무, 보생고무, 신흥고무, 태화고무, 동양고무의 총 6개인데, 이중 군산에 공장을 둔 경성고무를 제외하면 모두 부산 소재 업체들이었다.

1960년대 이미 포화 상태인 국내 시장의 대안으로 수출 시장이 열리면서 신발 산업은 또 한번 도약했다.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일본 등지에서 스포츠화 제조 기술 등을 들여와 기술 혁신과 함께 새로운 제품 시장을 열었다. 수출이 시작된 첫 해인 1962년 11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나, 그로부터 대략 10년이 지난 1973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였고, 그 4년 뒤인 1977년에는 5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수출시장의 급성장은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 세계적인 신발 브랜드들과의 이른바 ‘OEM 생산방식’을 통한 수출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OEM 생산방식’은 생산한 제품에 주문자의 상표를 부착하는 것으로 1974년 나이키와 (주)삼화의 거래가 최초였고, 이후 한국 신발 산업은 국제 메이저 브랜드들의 OEM 생산구조에 빠르게 편입되었다. 국제 메이저 브랜드들의 OEM 방식 대량 주문에 힘입어 신발업계는 주요 기업들을 중심으로 생산 규모가 커지고 대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로 1970년대 말 신발 산업은 종업원 몇 십명을 둔 중소공장의 이미지가 아니라 수 천명에서 때로는 1만 명 이상의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특히 선두 주자였던 국제상사는 1979년 종업원이 2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국제상사는 재벌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성장은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1988년 수출 36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의 5.8%를 점하여 한국 대표 수출산업으로서의 정점을 찍었다. 20만 명의 노동자가 신발업계에 종사하여 전체 노동자의 2.8%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신발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신발 산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성장한 속도보다 더 빠르게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주요 원인은 임금 상승과 원화절상에 따른 채산성 악화 때문이었다. 여기에 OEM 생산방식의 한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메이져 브랜드들이 생산 단가가 높아진 한국 신발 공장들에 대한 주문을 줄이고, 제조 기지를 제3국으로 급격히 이전했기 때문이다. 주문이 없으면 가동을 정지해야 하는 OEM 생산방식에 의존하여 발전한 신발 산업의 약점이 1980년대 말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다른 저임금에 기반한 산업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의 쇠퇴였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 신발 산업의 중심지였던 부산에서는 400개가 넘는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도산의 여파는 대기업들까지 미쳐서 1992년 (주)삼화, 1993년 (주)화승, 태광고무산업, 금호상사 등이 도산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늦은 감은 있었으나, 급격히 사양산업화하는 데 대한 대책들이 다양하게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이전 메이저 브랜드들의 OEM 주문 생산에 의존하던 주요 대기업들은 저임금 노동자를 찾아 제조 공장을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으로 이전하였다. 동시에 제조 기지 해외 이전에도 불구하고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는 한편으로, 과거의 단순한 OEM 생산 구조에서 탈피하여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기업간 연계 구조를 가지는 글로벌 생산 체제에서 생존하려는 모색을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한국 신발 기업이 고용하는 현지 노동자가 3만 5천 명에 달했다. 중소기업 중심으로 국내에 남은 기업들은 신소재 개발, 제조 기술 혁신을 통한 고품질 제품 개발, 디자인 역량 강화, 기능화 · 특수화 개발 등의 새로운 시장 개척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2000년대 신발 산업은 1970~8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그간의 다양한 노력들이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이 시기 세계에서 생산되는 신발 제품의 약 30%는 국내 자본과 자재, 관리 기술에 의해 생산되어서 한국 신발 산업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출 역시 4억 달러 중반대를 기록했다. 제조 기지를 동남아로 옮긴 기업들의 세계 메이저 브랜드 신발 OEM 생산도 2007년 기준 8천만 켤레로 대만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기술 혁신을 통한 고품질 기능화 생산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국내 업체도 등장하였다. 트렉스타, RYN 코리아, 비트로, 이너스 코리아 등의 신발기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2016년 기준 국내 신발 제조업체는 493개사이고 종사자는 1만 2천 명, 수출 규모는 4억 8,500만 달러였다. 2000년대 이후 신발업계의 변화와 성과를 근거로 ‘재도약기’로 규정하는 후한 평가들도 나왔다.

최근 신발 산업은 지난 몇 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국내외 경기 침체로 수출도 줄었고, 재택근무 증가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매출도 하락하였다. 그러나 2022년부터 엔데믹을 맞아 신발 시장은 국내외적으로 회복 추세이고, 업계도 적극적인 대응을 전개하고 있다. 부침은 있지만, 결국 앞으로도 신발 산업의 관건은 기술 혁신과 관련된 문제이다. 글로벌하게 유통될 수 있는 독자 브랜드 개발, 독창적 디자인에 기반한 다양한 고품질 · 고기능성 제품의 출시 등이 신발 산업 재도약 여부를 판가름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논문

김성주 외, 「한국 신발산업의 진화 동태성과 쇠퇴 요인」 (『한국경제지리학회지』 11-4, 한국경제지리학회, 2008)
김진엽, 「한국고무공업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배석만, 「1950년대 부산지역 고무공업의 구조 변화」 (『역사와 현실』 44, 한국역사연구회, 2002)

인터넷 자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https://newslibrary.naver.com)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https://nl.go.kr/newspaper)
신발정보지식포탈 슈넷 (신발산업진흥센터)(https://www.shoenet.org)
한국신발산업협회(http://www.footwear.or.kr)
집필자
배석만(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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