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채(玄采)
1900년 장지연과 함께 시사총보사를 광문사로 개칭한 후 『목민심서 』 등 정약용의 저서를 간행했다. 1905년 한성법학교 교장이 되었고, 1906년 대한농회 의원, 국민교육회 보강요원, 1907년 이토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평의원에 선출, 1908년 기호흥학회 찬무원, 대한중앙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월남망국사』, 『유년필독』, 『(중등교과)동국사략』 등을 저술했다. 1910년 최남선 등과 조선광문회에 참여했으며, 1911년 문예구락부의 편집장이 되었다. 1918년에는 서화협회 발기인, 1919년에는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친일단체 육성책의 일환인 대동사문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했다. 같은 해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직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