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군(昌城郡)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창성부는 9방(坊) 20리로 호구는 3,597호, 1만 7466명이었다. [근 대] 1895년의주부 창성군으로, 1896년평안북도 창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43년 수풍댐의 건설로 인한 침수로 창성면·전창면·창주면·우면 등 4개 면이 창성면으로 통합되어 5면으로 축소되었다. 1943년 이 군의 호구는 8,459호, 4만 6146명이었다. 3·1운동 때는 교회장로이던 강제희(康濟羲)를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하여 당일 2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이 군은 시위횟수 3회, 참가인원 3,000명, 사상자 100명, 부상자 50명이었다. 3·1운동 이후 상해와 만주의 독립전선과 연결되어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때의 독립투사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었던 강창제(姜昌濟), 274결사대원이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