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경(尹仁鏡)
다시 호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40년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5년 동안 우의정을 지내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어 명종이 즉위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소윤(小尹)에 가담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윤인경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사람의 의표(儀表: 겉으로 드러난 자세나 표정)가 의연하고, 평생 나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관용하였다. 좋은 일을 대하면 반드시 기뻐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힘쓰지 않았으니, 국사 처리에 있어 대체(大體)를 유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명종실록(明宗實錄)』윤인경 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