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수(朴崙壽)
1804년 대사간, 1805년 충청도관찰사, 1807년 이조참판, 1809년 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 1810년 예조판서·우참찬·대사헌·좌참찬·수원유수(水原留守), 1812년 전라도관찰사, 1814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15년 이조판서, 1816년 병조판서, 1817년 좌부빈객(左副賓客), 1820년 호조판서·빈객, 1821년 좌빈객 등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였다. 특히 판의금부사에는 15회 이상 임명되었다. 1818년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4년에는 아들이 많고 다복한 사람이 맡았던 권초관(捲草官)으로 선발되어 왕비가 공주를 낳았을 때 권초례(捲草禮)를 주재하였다. 글씨에도 조예가 있어 1807년 단경왕후(端敬王后) 온릉(溫陵)의 비석을 세울 때 해서를 썼다. 살아있을 때 금풍군(錦豐君)에 봉해졌으며, 1827년에 충헌(忠獻)의...